맨시니가 김득구에게 전하는 41년 만의 속마음
[이준목 기자]
불굴의 도전정신은 스포츠의 가장 중요한 존재가치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요소다. 비록 그 결과가 해피엔딩은 아닐지라도,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다면 도전했던 과정조차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1982년 11월 복서 김득구는 레이 맨시니와 세계 타이틀전에서 팽팽한 경기를 펼치다 14라운드에서 무너졌다. 안타깝게도 그는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세상은 김득구에게 비운의 복서라는 타이틀을 남겼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열정을 쏟았던 그의 도전정신은 영원히 역사에 남아 지금도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 SBS |
1월 1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내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 - 1982 최후의 도전'라는 부제로 고 김득구 선수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1970년대, 복싱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스포츠 중 하나였다. 한국 선수가 국제무대에서 타이틀을 따내면 '국위선양'이라는 이름으로 언론과 대중의 찬사가 쏟아졌고, 화려한 카퍼레이드와 대통령 축전까지받을 정도였다.
그 당시 챔피언급 선수를 배출한 명문 동아체육관에는 관원만 1400명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그 시절 복싱 선수의 인기는 지금으로 치면 웬만한 아이돌 스타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수많은 복싱 꿈나무들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꿈을 키워온 소년 김득구도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김득구가 주목받았던 것은 아니다. 김득구와 함께 복싱을 했던 동료들은 키와 체구가 작은데도 겁도 많았던 소년으로 김득구의 첫 인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1956년 강원도 고성군에서 태어난 김득구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전쟁 직후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김득구의 집안은 시골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한 축에 속했다. 김득구는 초등학교 졸업 직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해도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득구는 서울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하여 조용히 상경을 계획했다. 해줄 수 있는게 없기에 차마 아들을 잡을 수도 없었던 어머니는, 몰래 집을 나서려던 김득구의 손에 3천원을 쥐여주며 아들의 안녕을 빌었다. 김득구는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하고 집을 나섰다.
서울로 올라와 외판원과 각종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가던 김득구는, 우연히 TV에서 방송중이던 동양챔피언 김현치의 세계타이틀 도전 경기를 보면서 운명처럼 복싱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김득구는 그 길로 동아체육관에 찾아가 복싱을 시작했고, 일과 운동을 병행하면서 챔피언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 김득구를 처음으로 눈여겨본 것이 바로 김윤구 코치였다. "운동을 가르치다보면 선수가 되겠다는 게 눈에 나타난다. 김득구가 말도 잘 듣고 열심히 했다. 다른 선수들보다 근성이 있었다"라고 김 코치는 회상했다.
김득구는 1978년 제8회 전국 프로복싱 신인왕전에 출전하며 복서로 데뷔한다. 승승장구한 김득구는 불과 2년만에 한국 챔피언의 자리까지 오르며 김윤구 코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사람은 잘나갈때를 조심하라고 했던가. 가파른 성공가도에 마음이 잠시 느슨해졌는지 김득구는 훈련시간에 지각하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저질렀다. 이에 관장은 불호령을 내리며 김득구를 체육관에서 쫓아냈다. 복싱만이 전부였던 김득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였다.
당시 충격을 받은 김득구는 "나는 젊음을 권투에 걸었다. 나에게 권투를 그만두라는 것은 숨을 쉬지말라는 것과 같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져서 3일 만에 깨어날 수 있었다. 소식을 듣고 김득구의 진심을 깨달은 관장은 그에게 "그런 각오라면, 죽기살기로 다시 해봐. 마지막 기회다"라며 다시 한번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절치부심한 김득구는 더욱 강인한 선수가 되어 돌아왔고, 체육관에서 흘리는 땀 한방울은 링위의 피 한방울과 맞바꾼다는 각오로 오직 복싱에 올인했다.
김득구는 1982년 그의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라이트급 동양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하게 된 것. 상대는 당시 동양챔피언이자 '링위의 불도저'로 꼽히던 김광민 복서였다. 전문가들은 김광민의 우세를 예상했지만 김득구는 예상을 깨고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김득구가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챔피언이 된 김득구가 찾아간 곳은 바로 고향집이었다. 어머니와 고향 사람들은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김득구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김득구는 당시로서는 차 한 대값의 거액에 해당하는 대전료 3백만원, 그리고 운동과 병행하면서 준비한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얻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어머니에게 선물했다. 당시 김득구는 1982년 4월 8일 작성한 본인의 일기를 통하여 "우리 집안은 별볼일없는 시골의 제일 가난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고향의 넓은 바다와 붉은 태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며 애틋한 감회를 드러냈다.
착실하게 복서로서 성공가도를 밟아가던 김득구에게 일생일대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자리를 놓고 도전하는 것. 김득구가 넘어야 할 상대는 현 세계챔피언은 레이 맨시니였고, 관장은 코치와 상의한 끝에 김득구에게 미국 원정경기를 제안한다.
복싱 명문가의 금수저였던 맨시니는 천부적으로 체력-기술-파워를 두루 갖춘 무결점 복서로 꼽힐만큼 모든 면에서 김득구와 대조적인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당시 맨시니의 전적은 24전 23승 1패, 이중 무려 19번이 KO승일만큼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강의 복서로 꼽혔다. 맨시니가 세계무대에서는 아직 무명에 가깝던 김득구와의 대결을 수락한 것은, 타이틀을 방어해야 하는 챔피언 입장에서 비교적 약한 상대가 쉬웠기 때문. 이는 한국 복서들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상황은 모든 면에서 김득구에게 불리했다. 상대가 너무 강하기도 했거니와 전혀 낯선 미국 원정에서 경기를 해야하는 상황. 인기가 많은 맨시니 시합의 흥행을 위하여 김득구가 제물로 선택된 데 불과하다는 냉담한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김득구는 제안을 듣자마자 1초의 고민도 없이 수락하며 "죽기전에는 링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당시 김득구는 아내가 있었고 아이도 곧 태어날 예정이었다. 김득구는 자신의 아이에게는 절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었기에 반드시 세계챔피언이 되려는 열망이 컸던 것. 김득구는 맨시니와의 대결을 앞두고 지옥훈련에 돌입하며 한달간 총 150번의 스파링을 소화할만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준비했다.
당시 김득구는 "진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을거야"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놀랍게도 김득구는 직접 관을 준비해서 체육관에 가져오며 "맨시니를 여기에 넣어서 오겠다. 아니면 제가 여기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고. 미국으로 출국해서도 현지 호텔방에 '죽느냐, 사느냐' '사생결단'같은 문구를 새기며 끊임없이 전의를 다졌다고. 챔피언을 향한 본인의 열정과 정신력을 보여주려는 퍼포먼스였지만, 이후에 벌어질 안타까운 일을 생각하면 불길한 복선이었다.
김득구는 사실 맨시니의 강력함이나 그와의 실력차를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위축되지 않기 위하여 더욱 의지를 다잡고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계체량을 측정하는 날, 김득구와 맨시니가 처음으로 대면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히 스타 선수인 맨시니에게 집중됐다. 여유만만한 맨시니는 "당연히 제 펀치가 더 강하다"며 시종일관 느긋하고 자신감넘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김득구는 "복싱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스포츠다. 맨시니와 내가 이길 확률은 동등하게 50대 50"이라고 받아쳤다.
1982년 11월 14일(현지시간 13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에서 김득구와 맨시니의 경기가 펼쳐졌다. 8천 명의 관중 대부분이 맨시니를 응원하는 팬들이었지만 놀랍게도 곳곳에 태극기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미국 교민들이 김득구를 응원하기 위하여 현장을 찾아왔던 것.
모든 이들이 맨시니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던 승부,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김득구는 과감한 선제공격을 펼치며 맨시니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김득구는 맨시니와 정면으로 난타전을 펼치는가 하면, 경기중 두 팔을 치켜들고 도발하는 심리전을 펼치는 등 기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이에 고무된 코치진은 더 적극적인 경기운영을 주문했고 김득구는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한 미국 현지 해설진은 "김득구는 맨시니와 같은 링에 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감탄했다.
하지만 경기 중반을 거치면서 우려했던 체력차이가 드러났다. 10라운드를 넘기는 시점부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김득구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수세에 몰렸다. 맨시니의 거센 맹공에 김득구는 여러 차례 위기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냈다.
김득구는 맨시니와의 경기 이전까지 13라운드 이상의 경기를 한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상대를 떠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김득구에게는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던 것. 김득구는 맨시니에게 잇달아 강펀치를 허용하여 쓰러지고도 포기하지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운명의 14라운드, 김득구는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맨시니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가드를 올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던 김득구는, 맨시니가 날린 오른손 강펀치를 맞고 끝내 링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라운드가 시작된 지 불과 19초 만이었다. 김득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로프를 잡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심판은 링 코너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던 김득구의 상태를 보고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치열했던 경기는 그렇게 챔피언 맨시니의 KO승으로 막을 내렸다.
경기가 끝나고 얼마 후, 김득구가 다시 쓰러졌다. 김득구는 고통을 호소하며 의식을 잃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곧장 병원으로 후송되어 긴급 수술이 진행됐다. 의료진은 너무 많이 맞아서 뇌에 피가 고인 상태라고 진단했다. 수술 뒤 이틀 후 김득구에게는 뇌사 판정이 내려졌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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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은 그리고 고향의 어머니에게도 전해졌다. 김득구의 어머니는 12라운드에 정전이 오며 아들이 패배하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미국으로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았지만 김득구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시 취재진들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의 호흡기를 떼는 것을 허락했다며 "내 자식 김득구 선수는 세상을 떴거니와, 나라에 바치고 간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챔피언벨트를 따내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던 김득구의 슬픈 약속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김득구의 장례식은 권투인장으로 치러졌고, 김득구는 바다가 보이는 고향땅에 묻혔다. 가난한 복서들의 희망이자 영웅이었던 김득구는 그렇게 못다한 꿈을 남기고 일찍 하늘의 별이 됐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이후, 하루 종일 아들이 쓰던 낡은 글러브를 안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어머니는, 그리움과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불과 두달만에 극단적 선택을 하며 아들의 곁으로 떠났다.
본의 아니게 김득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맨시니도 경기 이후 엄청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제작진은 41년 만에 맨시니와 인터뷰를 가졌다.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된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경기는 제가 포기할 수도 있다고 느꼈던 유일한 경기였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펀치 때문에 저도 힘들었다"면서 "김득구를 KO시킨 마지막 펀치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저도 정말 힘들었기에 한 라운드라도 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맨시니는 김득구가 실려나갔고 결국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어떻게 안 느낄수 있겠나? 끔찍했다. 심장에 칼을 맞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한 맨시니는 "그날 이후로 다시 싸우기가 힘들어졌다. 싸우기가 싫었다. 제일 괴로웠던건 왜 내가 아니라 김득구였을까. 왜 내가 아니라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것이었다"며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맨시니는 그 사건의 여파로 살인복서라는 오명에 시달리다가 불과 24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 맨시니는 김득구와 링 위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보낸 인물이기도 했다. 맨시니는 김득구에 대하여 "그는 링 위에서 궁극의 전사 자체였다. 링 위에서의 40분간은 제가 그의 가족, 절친보다도 그를 잘 알았을 것이다. 파이터간의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는지, 얼마나 이기고 싶었고 정신력이 어땠는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라고 극찬했다.
맨시니는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다. 내가 죽은 뒤 언젠가는 김득구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이어 김득구에게 "안녕 내 친구, 사랑한다네"라며 못다 한 인사를 전했다.
김득구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단지 경기하다 죽은 선수, 비운의 복서가 아닌 '용기있는 도전자, 투지의 사나이'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왜 그토록 무모한 도전을 했느냐고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을 위해서 그만큼 노력해보지 않은 이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섣불리 평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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