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며느리의 명절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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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지 기자]
오랜만에 남편 친구들 모임에 갔다. 갑자기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코로나19로 한참 어딜 못 갔으니 가족동반여행을 가자는 말이었다. 서로 날짜를 맞춰보며 날을 잡으려는데, 세 가족이 어디 시간 맞추기가 쉽나. 아이들 스케줄까지 더하니 50년 뒤에나 갈 수 있을 듯싶었다. 그때, 한 친구의 아내가 호기롭게 말했다.
"구정에 가자, 그날은 다 쉴 거 아니야."
시댁 어르신들이 안 계셔서 프리한 명절 나기를 하는 집이었다.
"그럴까? 우리도 올해는 제사 안 지내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년 명절 증후군을 세게 앓던 부부네가 말했다.
"너... 너네도 가능하다고? 괜히 잘못 말 꺼내서 사달 나지 말고, 다른 날 찾아보자."
나는 얼른 말렸다.
"언니, 우리도 결혼 짬밥이 있는데... 어머님 아버님도 이제는 그렇게 안 팍팍하세요. 이번 설엔 일이 있어서 제사도 안 지내고... 오빠도 괜찮다고 하는 걸요, 뭘."
다들 예스라고 할 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노! 해야 한다.
"미안한데... 우린 아마 안 될 거야."
그때 남편이 대뜸 끼어들며 말했다.
"왜~ 우리도 얘기하면 되지. 신정에 본가 가고 구정엔 여행 가자!"
"허이고! 허세는~ 얘들아, 너희끼리 잘 다녀와."
우리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심청이와 효심을 겨루는 사람. 장남을 오매불망 기다릴 부모님을 두고 여행을 간다는 건 언감생심인 사람. 여행에 여! 자도 못 꺼낼 사람이 무슨... 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톱만큼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허풍으로 끝날 줄 알았던 남편의 여행 선포. 그런데 이 인간이 친구들이 고팠나? 정말 부모님을 설득하더니 급기야 승낙까지 얻어내고야 말았다. 아직도 얼떨떨하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 설 명절을 일주일 앞둔 16일 서울 강남구 한국은행 강남본부에서 현금 운송 관계자들이 시중은행에 공급될 설 자금 방출 작업을 하고 있다. 1000장씩 묶인 5만 원권과 1만 원권 등 지폐들은 비닐 등에 묶여 각 지역으로 옮겨진다. |
ⓒ 사진공동취재단 |
사실 결혼 20년 차가 가까워오니 명절이 그리 싫은 날만은 아니다. 전도 가뿐히 부칠 수 있는 기술도 연마했고, 친정에 가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을 내공도 키워 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나는 명절이 여전히 부담스럽고 힘든 것일까? 나에게는 가족 모임이 문제였다. 친인척들 다 모이는 대가족 모임.
비단 시댁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친정 가족 모임도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이모, 고모, 삼촌, 큰 아빠, 작은 아빠 등 친인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 이상한 위계 질서가 조성이 된다. 아침부터 밤까지 밥상, 술상을 차려내야 하는 여자들. 게다가 우리의 생활이 안줏거리가 되어 열렬히 참견받다보면 심신이 찬찬히 너덜너덜 해진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걸 가지고 뭘 그러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가족들이 선을 넘는 질문을 하고 여자들의 노동력을 당연시 하며, 며느리와 딸을 하위로 놓고 보는 그 당연함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편히 쉬라고 자리를 깔아주던 시댁 어른들도 친척들이 오면 갑자기 돌변해 며느리가 하인이 되길 바란다. 시댁 고모님 가족이 방문할 때마다 우리 어머님은 "이 음식들 우리 며느리가 다 해 왔어"라고 뻥을 친다. 귓속말로 "고모 있을 때만 네가 좀 수고해라"라며 나를 앞장 세워 일을 시키신다. 나는 네에 네에, 굽신굽신 하며 눈치껏 예쁜 며느리인 척을 한다.
남편의 어린 사촌들도 명절 노동은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하는지 부엌 쪽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20여 년 동안 나는 그들이 올 때마다 대접했지만 그들이 나를 도운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얄미운 손님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도대체 가족의 범위는 어디까지인 것일까?
▲ 웹드라마 며느라기 홍보 이미지 |
ⓒ 카카오tv |
늘 이런 근원적 의문에 휩싸이곤 한다. 이번 명절에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매번 오시는 고모님이 설에 사정상 오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쿵저러쿵할 친인척들이 안 오니까 우리는 떠날 수 있다.
외국에서는 코로나19 이후 코비드(Covid)와 이혼(Divorce)의 합성어인 '코비디보스(Covidivorce)'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이혼율이 늘어났다고 한다. 반면에 국내에서는 외려 코로나 이후 이혼율이 줄어들었다고 한다(2021년 사회조사결과, 통계청). 왜일까? 전문가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 가족들과의 모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완화된 이번 명절 이후엔 수치가 또 어떻게 바뀔지 내심 궁금하다.
어르신들은 백이면 백, 가족이 많이 모이면 그것을 화목함으로 여긴다. 가족 내 다툼이 일어나도 가족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고, 상처를 주면 가족이니까 이해하라고 한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
나는 나를 잘 모르는 먼 친척들이 나를 불편해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이니까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모르면서 이런저런 참견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의 화목함이라는 것은 가족 내 몇몇의 희생으로 쥐어짜듯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납득되는 관계 속에서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설 명절, 가족 모임이라는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저는 떠납니다. |
ⓒ 인터넷 화면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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