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보다 먼저 500살 팽나무의 가치를 알아본 이 사람
[윤성효 기자]
▲ 박정기 노거수를찾는사람들 대표활동가. |
ⓒ 박정기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화제를 모은 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남 창원 북부리 팽나무. 수령 5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의 가치를 일찍부터 알아본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를 함께 품은 노거수(老巨樹)를 지키는 활동에 매진해온 박정기(62) 노거수를찾는사람들(노찾사) 대표활동가입니다.
박정기 활동가는 창원 팽나무가 '우영우 나무'로 유명세를 타기 전인 2021년 2월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 우수재원으로 추천한 바 있습니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뒤늦게 그의 충언이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경상국립대와 부산대 대학원에서 조경학을 공부한 그는 1994년경부터 경남 일원의 천연기념물·도기념물·시군보호수 등 노거수를 조사·연구하고 발굴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박 활동가는 국내 최대 규모인 경남 고성 금산리 팽나무를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고, 노거수 답사를 진행해 천연기념물 우수재원을 여럿 추천한 전문가입니다.
창원 북부리 팽나무뿐만 아니라 산청 입석리 은행나무, 하동 두양리 은행나무, 하동 청룡리 은행나무, 거제 명진리 느티나무, 거제 외간리 동백나무, 창원 대평리 서어나무, 창원 안성리 노박덩굴, 창원 동전리 푸조나무군, 창원 고사리 푸조나무군, 진주 장재동 푸조나무 등이 그의 추천으로 천연기념물이 됐거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런 활동 성과를 인정받아 2019년에는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생태환경 부문 지역혁신가상을, 2020년에는 산림청장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참석했던 '국민과 함께하는 거제 저도 탐방' 때는 팽나무 노거수 해설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는 "노거수에선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현상을 인간사에 결부시키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면서 지역 공동체 문화 보존 차원에서라도 노거수 보존을 위한 예산과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족 명절인 설을 앞둔 19일, 박정기 대표활동가와 노거수의 전통적 가치와 보존방안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 거제 망치리 송악. |
ⓒ 박정기 |
- 어떤 계기로 노거수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딱히 어떤 계기가 있던 건 아닙니다. 고향이 거제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산골마을 하늘 아래 첫 집에서 태어나 나무만 보고 자랐고, 고향마을 큰 당산나무 아래서 주로 놀았지요.
육지로 나오니 가는 곳마다 노거수가 있어서 자연스레 고향 당산나무와 비교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고향 당산나무보다 작았지만, 수종과 수형, 공간구조,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수형미는 다른 점이 있어서 눈여겨 봤습니다. 대학원 때 노거수 관련 논문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노거수를 찾아다니게 됐습니다."
- 우리나라엔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정자나무 같은 민족문화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나무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연유가 있을까요.
"국토의 7할이 산이니까 우리 민족은 나무와 함께 살아온 셈이죠. 그런데 산의 나무는 집을 짓거나 땔감, 생활도구나 농기구를 만드는 데 이용했다면, 마을의 나무는 특별한 공동체 문화였습니다. 당목, 신목, 수호목, 소원목 등으로 불리며 섬겼으니 마을의 구심점이자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현상을 인간사에 결부시키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 오래된 나무는 많은 이야기나 전설을 갖고 있을 것 같은데요. 이와 관련해 특별히 생각나는 나무가 있나요?
"오래 된 나무 치고 이야기와 전설을 가지지 않은 게 있을까요? 나무는 자연생태의 구성물이자 인류문화의 산물입니다. 노거수는 선조들의 애환이 스며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최치원, 이성계, 이순신, 사명대사, 곽재우 등 역사를 빛낸 인물들의 발자취를 말없이 지켜본 증인이기도 합니다. 박정자(朴亭子), 강정자(姜亭子), 오정자(吳亭子), 원정자(元亭子) 등 심은 이의 이름을 갖고 살아온 노거수가 특히 생각납니다."
- 일반 사람들은 노거수라고 하면 오래된 나무라는 의미가 밖에 모르는데, 노거수에 특별한 매력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인간의 평균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나이, 웬만한 빌라보다 더 높은 크기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켜켜이 쌓아온 나이테 속에는 그해 그해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테죠.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를 만나는 것입니다. 계절에 따라 주변 풍경과 함께 펼쳐지는 멋진 경관은 덤이지요."
- 지금까지 노거수 조사와 연구를 해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무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단연 창원 북부리 팽나무입니다. 2014년 겨울에 찾아서 2015년 봄에 세상에 알렸고 그해 창원시 보호수가 됐습니다. 2021년 2월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천했는데, 지난해 '우영우 팽나무' 신드롬으로 스타덤에 올라 천연기념물이 됐지요. 덕분에 저도 유명세를 좀 탔습니다(웃음)."
- 지난해 창원 북부리 '우영우 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도록 애를 많이 쓴 것으로 압니다. 이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요?
▲ 창원 의창구 대산면 북부리 동부마을 ‘팽나무’ |
ⓒ 박정기 |
"외과수술식 노거수 관리는 지양해야"
- 반대로 가슴 아프거나 안타까운 노거수가 있나요?
"2021년 초 창원 북부리 팽나무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추천한 창원 안성리 '노박덩굴'은 붙어 자라던 서어나무를 보호한다며 밑동 채 베어버려 죽었습니다. 국내 두 번째 크기에 해당되는 제원을 가지고 있는 창원 대평리 '개서어나무'는 최근 밑동이 썩고 수형이 붕괴돼 고사 직전에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 각종 개발로 오래되고 보존돼야 할 나무들이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는지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지역을 한정해서 몇몇 사례를 든다면, 우선 진해 중원광장(옛 중평들판)에 수령 1000년 팽나무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신시가지 조성공사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고사했습니다. 옛 진해 육군대학 터에 있던, 경남에서 가장 큰 곰솔은 개발 과정에서 고사했고요. 안골동 신당 푸조나무는 진해신항 공사로 산을 통째로 깎아내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 개발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나무가 잘 보존되는 사례가 있는지요.
"개발에 장사(壯士) 없습니다. 그중 도로는 적이고, 노거수 바닥에 시멘트와 콘크리트 포장은 주적이며, 사람을 위한 시설물은 태클입니다. 다만 일시에 과도하게 개발하는 행위가 치명적인 건 맞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시나브로 하는 개발은 어느 정도 견뎌냅니다. 불가피하게 개발을 했다면 그만큼 섬세한 보호·관리가 뒤따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늘 안타깝고 죄인이 되는 심정입니다."
- '노찾사(노거수를찾는사람들)'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여하는 분들과 그간 해온 주요활동을 소개해주십시오.
"'노찾사'는 작은 동호인 모임입니다. 회장도, 총무도 없고 회칙도 없습니다. 입회나 탈회도 자유롭습니다. 부정기적으로, 그러나 자주 지역의 노거수를 찾아다니는데 해외 답사도 두 차례 다녀왔습니다.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은 노거수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를 발굴하고 보존 방안을 제안하는 활동을 10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창원 북부리 팽나무, 고성 금산리 팽나무, 진주 장재동 푸조나무, 창녕 성사리 모과나무, 남해 난음리 비자나무 등 제원이 우수하고 학술 가치가 높은 노거수를 발굴했습니다."
- 노거수 보호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우선, 노거수는 생육기반이 되는 지표의 생태적 관리가 핵심입니다. 열악한 환경은 그냥 둔 채 외과수술에 의존하는 노거수 관리는 건전한 생육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노거수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로 지양돼야 합니다.
또 신목, 당목, 마을나무라는 인식이 있고 제례의식이 행해지는 노거수는 마을 내에서 보호 의식이 높습니다. 실제로 건전한 수세(樹勢)가 지속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므로 당산제 등 공동체 문화에 예산 지원이 필요합니다."
- 노거수 보호를 위해 바꾸어야 할 제도나 정책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보호수를 지정할 때 현재 홀로 서 있는 노거수(단목) 위주로 진행합니다. 간혹 여러 노거수가 무리지어 있는 군집(수림지)을 지정하기도 하는데, 지속가능한 보호·관리 측면에서 군집 단위 보호수 지정을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 진해 중원광장 팽나무. |
ⓒ 박정기 |
▲ 진해 옛 육군대학 터 곰솔. |
ⓒ 박정기 |
▲ 고성 금산리 팽나무. |
ⓒ 박정기 |
▲ 노거수를찾는사람들. |
ⓒ 박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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