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라도 좋은 작품 할 겁니다" 끝까지 배우로 살았던 윤정희 [1944~2023]
"배우라는 건 인간을 그리는 일이잖아요. 인간이 10대, 20대만 있나요. 저는 70대라도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할 겁니다.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건 배우로서 제 자존심이구요."
배우 윤정희씨가 영화 '시'를 찍고 있을 무렵 들려준 말이다. 당시 60대 중반의 그는 이 영화로 16년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참이었다.
2010년 개봉한 '시'는 칸국제영화제에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그는 국내는 물론 LA비평가협회 등 해외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곤궁한 노년에 여전히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외손자를 돌보기 위해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도 시를 배우러 다니는 주인공은 이름은 '미자'. 마침 그의 본명 '손미자'와 같은 이름이다.
20일(한국시간) 프랑스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한국영화의 1960년대 전성기부터 대스타였다. 1944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한 그는 대학 진학 후 김내성의 소설이 원작인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1967년 화려하게 데뷔했다. 영화사가 주최한 신인 배우 공모에서 1200대 1의 경쟁을 뚫은 결과였다. 같은 해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다. 먼저 데뷔한 배우 문희씨, 남정임씨와 함께 한국영화계에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세 배우의 활약을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빗댄 표현이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씨는 그를 두고 "연기와 작품에 대한 욕심과 집념이 대단했고 작품을 해석하는 천부적 감각이 뛰어났다"고 돌이켰다. 특히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의 100년사에 남을 작품이 여럿"이라고 강조했다. '시'(이창동 감독)에 앞서 60~70년대 주연을 맡은 '강명화'(감대진 감독), '안개'(김수용 감독), '장군의 수염'(이성구 감독),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감독), '이조 여인 잔혹사'(신상옥 감독), '분례기'(유현목 감독), '석화촌'(정진우 감독)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3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고,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결혼한 이후로도 영화를 떠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살면서 틈틈이 한국에 돌아와 80년대 '위기의 여자', 90년대 '만무방'을 비롯해 영화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전쟁이 배경인 '만무방'으로는 생애 두번째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시'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됐다. 공교롭게도, 그가 연기한 미자는 극중에서 뭔가를 자꾸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윤정희씨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사실은 2019년 남편 백건우씨의 본지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인터뷰에 함께한 외동딸 진희씨는 "엄마는 요즘도 '오늘 촬영은 몇 시야'라고 물을 정도로 배우로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며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사람이다. 이 병을 알리면서 엄마가 그 사랑을 다시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병세가 심해지기 전까지, 부부는 세계 각지를 수시로 오가는 백건우씨의 연주 여행에 늘 함께였다. 윤정희씨는 한 해 절반을 길에서 보내는 강행군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배우 시절의 경험으로 돌렸다. "잠 좀 자는 게 꿈"이라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시'를 찍을 무렵에는 "촬영현장이 좋아져서 깜짝 놀랐다"고도 했다.
그는 영화나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화려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인터뷰 때마다 "인생을 그리는 것"이라는 지론을 거듭 들려줬다. "저는 마지막까지 영화배우를 생각하고 있어요. 영화가 인생을 그리는 건데 어떻게 인생에 젊음만 있나요."
영화인생 43년에 걸쳐 그가 남긴 작품은 약 300편을 헤아린다. 백상예술대상·대종상·청룡영화상·부일영화상 등을 아울러 여우주연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2011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예술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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