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시 감상 후 열살 아이 마음에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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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혜련 기자]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문자가 왔다.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티켓 사용 가능 기한이 임박하였으니, 기한 내에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파리, 뉴욕보다 빈을 사랑하는 사람.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 전시'라는 문구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봤던 소녀가 그려진 포스터에 혹하여 10월에 사둔 얼리버드 티켓이었다. 전시 장소는 국립중앙박물관.
나는 전시를 보러 아이와 2시쯤 갔다. 방학이라 평일에도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생각만큼 붐비지 않았다. 좋았던 건 얼리버드 티켓 구매자는 실물 티켓으로 교환 후 즉시 입장할 수 있었다는 것.
현장 티켓 구매자는 시간대별로 정해진 인원이 있어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전시를 보기 전부터 지친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욱더. 얼리버드 티켓을 사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합스부르크 600년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포스터 |
ⓒ 국립중앙박물관 |
'여기서 역사 공부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전시를 보지는 말자.'
아이에게도 작품과 해설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라고 잔소리 하지 않았다. 미술관에서는 즐거움과 호기심이 우선이기에.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 지식보다는 영감(靈感)이길 바랐다.
▲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가 있는 접시> |
ⓒ 진혜련 |
다른 작품을 보고 있는 나에게 아이가 얼른 와보라며 탄성을 자아내던 작품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가 있는 접시>다. 커다란 금빛 원형 접시에 성경 이야기의 그림들이 눈이 절로 크게 떠질 만큼 세밀하고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
ⓒ 진혜련 |
이번 전시에는 루벤스의 작품도 있었다. 나는 루벤스 그림을 직접 본다는 게 감격스러워 "와! 루벤스!" 하고 외치며 작품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날 보고 아이는 물었다.
"루벤스가 누군데요?"
"넬로가 좋아한 화가. 마지막에 아이가 성당에서 루벤스 그림 보다가 죽었잖아."
"넬로?"
"너 파트라슈 이야기 몰라?"
"파트라슈?"
이런! 나는 아이가 세계 명작동화를 모른다는 사실에 조급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우유배달을 했는데 항상 개랑 같이 다녔거든. 그 개가 파트라슈 아니 플랜더스였나?"
막상 이야기를 내 입으로 전해주려고 하자 이름과 내용이 마구 헷갈렸다. 나는 얼른 휴대폰으로 '플랜더스의 개' 줄거리를 찾아 본 후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그림 앞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이 옆에 찰싹 붙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넬로는 가진 게 없어도 꿈이 있었어. 화가가 되고 싶어 했지. 넬로는 성당에 걸려있는 루벤스 그림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볼 수 없었어. 그걸 보려면 돈을 내야 했으니까."
"성당에서 왜 그런 거예요? 그림 그냥 보여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굴었나 몰라.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플랜더스의 개' 이야기 덕분에 우리는 루벤스 작품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그림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지만, 우리는 루벤스의 다른 작품을 보면서도 넬로의 꿈과 간절함을 떠올렸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대형 초상화 앞에도 오래 있었다. 거기에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실 가운데 기다란 소파가 있고, 테이블 위에 헤드폰과 태블릿 PC를 설치해놓아 음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플레이리스트에는 빈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여러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 아이가 선곡한 베토벤의 '합창', 슈트라우스의 '박쥐' 서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등을 들었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다른 소음은 차단된 채 오직 음악만을 들으며 물끄러미 작품을 바라보니 다른 것은 모두 멈추어 있고 오로지 내 시간만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근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이도 마음에 들었는지 곡이 끝나면 연이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전시 마지막에는 고종이 오스트리아에 선물한 조선 왕실의 갑옷과 투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의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라고 한다. 먼 이야기라고만 여겼던 합스부르크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아이는 특히 투구에 새겨진 발톱이 5개 달린 용을 보고 너무 멋지다며 감탄했다.
"우리나라도 솜씨가 정말 좋았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전시장 밖으로 나와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전시에서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았어?"
나는 어떤 작품이 아이 마음에 들어왔을까 궁금했다. 아이는 말했다.
"엄마가 '플랜더스의 개' 이야기해 준 거요."
아이가 전시를 보고 마음에 간직한 것은 수많은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 앞에서 엄마가 들려준 동화였다.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만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내가 빈이라는 도시를 좋아하는 것도 지금은 아이의 아빠가 된 그와 벨베데레 궁전에서 클림트의 <키스>를 보며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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