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신세계로부터
작년에 오디오가 생긴 후로 클래식과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새해 계획 중 하나랄까. 전에도 몇 번 시도는 있었다. 첼리스트 요요마의 내한 공연이나 통영국제음악제처럼 언론에서 크게 소개하는 이벤트를 찾아가기도 했다. 독일 베를린 여행 때는 일행의 제안으로 베를린필하모닉 공연에도 갔었고,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소식에 그의 연주 영상을 몇 번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조용하고 치열한 내면의 방황 끝에, 졸고 말았다. 쩝. 나는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내력 있는 클알못(클래식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멋진 오디오가 있다고 바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운전의 룰을 익히고 도로에 나가는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좋은 차가 있어도 드라이브를 즐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연주가 시작되고 지금 내 귀에 음악이 들리는데도 뭘 어떻게 들어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많다. 여러 악기 중 어떤 소리를 쫓아야 할까, 겨우 하나 따라가다가 그 악기가 쉴 때는 여지없이 길을 잃는다. 어쩌다 ‘이번엔 1주제와 2주제가 뭔지 알 것 같아. 잘 들었어’ 해놓고도 뒤돌아서기가 무섭게 음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황당함도 자주 겪는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하는 날들이다.
사람들이 내가 기획한 전시에 와서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 ‘뭘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심정이 이해가 된다. 나 역시 스페인어 수업을 두 달 들었지만 허무할 정도로 기억나는 게 없으며, 직접 보면 다를 것이라는 친구를 믿고 야구장에 가서는 환호하는 관중들 틈에 앉아 하품만 했던 전력이 있다. 아기가 말을 하게 되기까지, 일어나 걷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실패가 반복되는지 생각해본다. 유명 오케스트라 공연에 한 번 다녀오면 첫눈에 반하듯 클래식에 빠져들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곧 올해 첫 음악회에 갈 예정이라 예습을 하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찾아 듣는다. 음악과 함께 화면에는 쓸쓸한 도시의 모습 같은 이미지들이 펼쳐지고 그 위에 라흐마니노프의 생애와 악장에 대한 정보가 자막으로 제공된다. 900개가 넘는 댓글들도 훑어본다. 곡에 대한 찬사, 영상과 설명 덕분에 음악이 더 잘 이해된다는 감사, 자신들이 알고 있는 추가정보와 감상평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눈으로 라흐마니노프와 이 곡이 얼마나 대단한지 파악하는 사이에, 내 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플레이, 몇 번을 듣기에 집중하다 보니 뭔가 들리는 것도 같다.
어떻게 해야 클래식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음악가 생애와 시대 상황부터 공부해야 할까? 질문과 고민 사이로 비슷한 상황이 스쳐간다. ‘현대 미술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이죠?’ 누군가 미술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서성일 때 전시기획자로서 나는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돌아본다. ‘미술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같은 하나 마나 한 대답, ‘일단 많이 보세요’ 같은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은 건 아닐까. 낯선 영역에서 무지렁이가 돼 꼼지락거리다 보니 초보자의 마음과 안내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알게 된다.
클래식 음악과 가까워지려는 시도는 나로서는 오랜만에 미지의 세계를 향해 문을 두드리는 일이다. 쉽지 않기 때문에 도전과 노력의 좌절과 즐거움을 맛보는 과정 자체가 활기차다. 이번에도 클알못의 모험담만 추가되면 어떠랴. 몰랐던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일, 그 문을 열고 한발 내딛는 일, 새로운 기쁨을 맛보고 생각과 감각을 확장하는 일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설렌다. 클래식이 없던 세상에서 클래식 음악이 있는 세상으로의 이동이다. 시각 정보에만 민감하던 사람이 어딘가에서 클래식이 들려오는 걸 감지하고,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여보게 됐다는 것이다.
오늘도 음악을 듣는다. 며칠 후 음악회에서 라흐마니노프 다음에 듣게 될 곡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다. 새로운 세상은 그냥 열리지 않는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난 나쁜 엄마” 오열했던 장애딸 살해 母, 선처받았다
- “중국 20대女, 韓서 성형수술 중 사망”…현지선 ‘혐한’
- 文 키우던 풍산개에 1억5000만원…광주시 예산편성
- 말썽꾸러기 MZ세대?…“X세대보다 사회성 높다”
- “너 이르면 죽어” 14개월 아기 상습학대 돌보미 [영상]
- 지하철서 담배 ‘뻑뻑’…“신고해?” 묻자 황당 반응 [영상]
- ‘아기머리 쿵’ 베베캠에 딱걸린 조리원…“허위사실 난무”
- ‘직장내 괴롭힘’ 신고했더니…출퇴근 기록 열람한 상사
- ‘조폭 협박 때문?’… ‘쌍방울 금고지기’ 귀국 왜 엎어졌나
- 고교학점제도 문과침공도 ‘어찌 되려나’… 사교육만 ‘꿈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