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풍성한 설 맞는 우크라 고려인들… “역사하심 있었다”
안엘레나(43·여·사진)씨에게 지난해 초봄은 악몽 같았다. 우크라이나 서남부 미콜라이프 지역에 살던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난생처음 전쟁의 공포에 몸서리쳐야 했다.
“죽는 줄 알았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폭격이 시작되면 땅과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지하실에 숨어 살면서 언제쯤 이 전쟁이 끝날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집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집을 잃은 그가 택한 피란지는 한국. 고려인인 그에게 한국은 제2의 고향이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로 피란을 갈 수도 있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고려인이 한국 아니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설을 나흘 앞둔 18일, 안씨를 만난 곳은 광주 광산구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였다. ㈔고려인마을이 운영하는 이 센터의 관계자들은 오전부터 설 잔치 준비로 분주했다. 안씨를 비롯한 고려인 10여명이 준비한 식탁엔 산해진미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는데 굴비 갈비 전복 낙지처럼 값비싼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많았다. 만둣국처럼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요리, 마르코프차(채를 썬 당근을 새콤달콤하게 무친 김치)처럼 고려인의 향수를 달래주는 반찬도 눈에 띄었다.
안씨와의 인터뷰는 잔칫상이 차려진 뒤에야 진행됐다. 그는 지난해 4월 8일 아버지(69) 어머니(65) 딸(21)을 데리고 한국에 입국해 곧바로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2016년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고려인마을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한국과 우크라이나를 오가면서 살았죠. 현재는 센터에서 실무자로 일하며 월급도 받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쟁 이후 저희 가족의 피란 생활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안씨는 고려인마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광주의 한 월셋집에 살고 있는데 집을 구할 때 보증금 200만원을 고려인마을에서 지원했다. 이 단체는 안씨의 어머니 허리 수술비 800만원, 청각장애가 있는 딸의 보청기 구입비 300만원도 부담했다.
고려인마을이 둥지를 튼 광산구 일대에는 고려인 7000여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떠나 한국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고려인은 약 700명이다.
고려인마을의 이런 활동을 이끄는 주역은 이천영(65) 고려인마을교회 목사와 이 단체 신조야(68·여) 대표다. 이들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현지 고려인 피란민의 한국 입국을 돕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모금을 통해 항공권을 구입해 피란민에게 제공한 게 대표적이다. 이 목사는 “피란민에게 생명줄을 던진다는 심정으로 이 사역을 감당했다”고 말했다.
“이게 엄청난 재정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저희에게 돈이 있을 리 없잖아요? 기도밖에 답이 없었어요. 날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더군요. 생각하지도 않았던 기업들로부터 후원금이 답지했고 교회들의 지원도 이어졌어요. 저희는 한 게 없어요. 전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그러면서 이 목사는 고려인 피란민이 한국에서 마주하는 고충에 대해 들려주었다. 가장 시급한 부분은 의료비 지원이다. 이들은 건강보험 대상자가 아니기에 병원에 입원하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이 목사는 “의료비 때문에 힘들 때가 많지만 고려인 가운데 누군가가 우리 덕분에 복음을 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걸 볼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 대표 역시 크리스천으로 고려인마을교회 권사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11개월간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피란민을 섬기면서 느낀 안타까움을 토로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났고 누가 잘못했는지는 잘 몰라요. 확실한 건 전쟁 때문에 ‘보통의 백성들’이 고생한다는 거예요. 우크라이나에서 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특히 아이들이 불쌍해요. 우크라이나에 다시 평화가 깃들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어요.”
광주=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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