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MB·문재인·윤석열의 아부다비
윤 대통령 300억 달러 유치로 이어져
가교로서 대통령 역할 이해해야
2011년 3월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순방 때의 기억이다. 바라카 원전 예정 부지 기공식에 참석하는 일정이었다. 평소라면 팡파르가 울렸겠지만, 동일본 대지진 직후라 대단히 복잡했다. 현지에선 그러나 왕세제였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현 대통령의 열정이 두드러졌다.
순방 마지막 날 MB와 기자들의 저녁이 있었다. 소회를 물었더니 MB가 이렇게 답했다. “힘들었다. 왕세제 마음이…. 전화를 많이 했다. 처음엔 말도 아니었다. 참모들은 의전상 안 좋다고 그러고. 왕세제가 전화를 받을 때 계속 얘기하니 (왕세제) 부인이 누구냐고 묻더란다. 다음 통화할 때 또 물어서 그땐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MB는 자서전(『대통령의 시간』)에도 이 일을 자세히 담았다. 자서전에 따르면 2009년 11월 초 UAE가 “원전을 프랑스에 주기로 했다”고 통보했는데도 MB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통령 체면이 말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MB는 어렵사리 연결된 통화에서 왕세제에게 원전 말고도 경제·교육·안보협력 파트너로 한국을 부각했다고 한다. UAE가 원전을 건설하려는 데엔 군사안보적 이유도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전화를 끊곤 바로 이렇게 지시했다. “국방부 장관, 경제팀 등 여러 분야 사람들을 포함해 대표단을 꾸려라.”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아니었다.
MB는 왕세제에게 방한을 제안하며 한국 특전사 훈련을 보라고도 했다. 실제로 본 왕세제가 반했다. 왕세제 자신이 특전사 출신의 UAE 통합군 부총사령관이었다. 2010년 12월부터 특전사의 대테러부대(훗날 아크부대)가 UAE로 파병된 배경이다. MB는 “UAE가 이란이라는 강대국을 마주하는 입장에서 국가 안보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고 적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란 발언을 두고 논란이다. 비외교적일 정도로 직설적 언사였다. 대단히 부적절했다. 그 여파를 보고 있다. 그러나 진실과 동떨어진 건 아니다. 중동·북아프리카 곳곳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신냉전’을 벌이고 있다. 예멘에선 열전 중이다. UAE는 사우디 연합군의 일원이다. 지난해 1월 문재인 대통령이 UAE를 찾았을 당시 예멘 반군이 드론으로 아부다비를 공격했는데, 예멘 반군을 지원하는 데가 이란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인 임종석 전 실장이 최근 부리나케 윤 대통령을 향해 “결코 말로 대충 얼버무릴 사안이 아니다”고 비난했던데 과연 그럴 자격이 있나 싶다. 다들 알다시피 문 정부 초기에 UAE 관계가 크게 휘청였다. ‘적폐청산’ 차원에서 UAE와의 군사협력을 들여다보다 사달이 났다. 임 전 실장이 부랴부랴 특사로 가서야 봉합됐다. 이후 우리 국방과학연구소(ADD) 퇴직 연구원이 수조원대 미사일 기술을 UAE로 유출했는데도 유야무야한 일이 있다. 누굴 나무라나.
진정하고픈 얘기는 따로 있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방문을 두고 대통령실에선 기대 이상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중국 정도(50억 달러) 투자 약속만 해도 좋겠다”고 여겼는데 여섯 배(300억 달러)를 했다면서다. 성과다. 그러나 오롯이 윤 대통령만의 성과는 아닐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 앞서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을 특사로 보냈다. MB의 청와대 정책실장·수석이었던 터라 아부다비엔 낯익은 인물이다. 윤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친서만 아니라 MB의 친서도 들고 가게 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바람직한 일이다.
대통령들은 전직 대통령이 남긴 공과 위에서 출발한다. 더 나아갔다면 더 나아간 데서, 뒷걸음질쳤다면 뒷걸음질친 데서 시작한다. 그리곤 공과를 남긴다. 대통령 스스로 과도기적 인물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선 대통령들을 이해하고 다음 올 대통령들을 배려해야 한다. 특히 외교에선 말이다.
고정애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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