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배의 시선]전세 지원 정책의 그늘

김원배 2023. 1. 2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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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논설위원

"3명 정도 의기투합하면 전세 사기를 벌일 수 있도록 국가가 판을 깔아준 것 아닙니까?"
지난 10일 국토교통부 주최로 열린 '전세 사기 피해자 2차 설명회'에서 나온 한 피해자의 말이다. 지난해 수백여채 집을 소유한 ‘빌라왕’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입자가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 사기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검찰과 경찰이 대대적 수사에 나서면서 빌라왕 배후에 있는 컨설팅 업자와 브로커 조직이 검거됐다.


빌라왕 일당, 보증제도 허점 노려


하지만 이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피해자의 지적대로 정부가 판을 깔아준 측면이 있다. 역대 정부는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전세를 얻기 쉽도록 지원한 것이지만, 금리 상승과 집값 하락이 이어지며 부작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중엔 정부가 지원하는 저금리 전세 대출을 받아서 전세 보증 상품에 가입한 경우가 적지 않다. 정부가 자금을 빌려주고 이 돈을 떼이지 않도록 보호하는 보증보험까지 만들었다. 10일 피해자 설명회에선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시세를 공시가격의 150%까지 인정해주며 (사기범이) 시세를 조작하게 해준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빌라왕' 여러 명의 배후로 지목된 신 모 씨가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법원을 나오고 있다. 뉴시스

공시가격의 130%이던 보증 한도는 2015년 150%로 높아졌다. 당시엔 공시가격의 시세 대비 현실화율이 낮아 보증을 충분히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시가격 현실화율이 높아지면서 공시가격의 150%가 시세를 넘을 수 있게 됐다. 보증금을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입자도 이런 전세가를 받아들였다. 사기범 일당에겐 공시가격의 150%가 사기의 한도가 된 셈이다.

세금을 매기기 위해 공시가격을 산정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돈도 빌려주고 보증도 하고 공시가격을 통해 빌라 전셋값도 정부가 다 정해준 것이다. 빌라왕 일당은 이런 구조를 교묘하게 악용했다. 변변한 자기 돈 없이 전세를 끼고 1000여채 넘게 집을 산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지난해 9월 전세 사기 대책을 발표했던 정부는 지난해 10월엔 민생안정 대책으로 청년 및 신혼부부에 대한 버팀목 대출(전세대출) 한도를 확대했다. 청년층의 경우 대출한도가 7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신혼부부는 최대 2억원에서 3억원으로 각각 늘었다.


HUG가 물어준 돈 9000억 넘어


한도를 늘려 혜택을 주자는 취지는 좋지만, 과연 계속해서 전세대출 한도를 늘릴지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전세는 집값 하락기엔 시세가 전세보증금을 밑도는 ‘깡통 전세’가 될 위험이 있다. 깡통 전세가 빈발하면 의도적인 사기가 아니더라도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이는 HUG 같은 보증기관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HUG가 전세보증금을 대신 물어준 액수(대위 변제)는 2021년 5040억원에서 지난해 9241억원으로 불어났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박성욱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부동산 제도의 장기적 정비 방향에 대한 제언’에서 “임차보증금에 대한 공적 보증을 확대하여 임차인 보호를 강화하는 방식은 경제 전체로는 위험이 줄어들지 않고 보증기관으로 이전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전세보다 매매나 월세로 돌려야


지금 당장은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제하는 게 먼저다. 다만 장기적인 대책도 준비해야 한다. 저금리 전세 대출과 보증을 늘리기보다 한도를 점차 줄이고, 일부 월세(반전세)나 집을 사는 쪽으로 유도해야 한다. 공공임대주택도 확충하고, 월세를 택하는 저소득층에겐 지금보다 월세 세액공제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무주택자 청약제도도 손볼 필요가 있다. 10일 설명회에서도 "전세 사기 피해자가 전셋집을 경매로 낙찰받은 경우 무주택 기간과 청약 자격을 유지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빌라에서 전세를 살면서 돈을 모아 무주택 청약으로 아파트를 장만할 꿈을 가진 사람이 많다.

지금도 전용면적 60㎡ 이하, 공시가격 1억3000만원 이하(수도권)의 소형 저가주택을 보유하면 무주택자로 보지만 가격 기준이 너무 낮다. 무주택자 기준을 완화하면 대출로 전세를 얻기보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다.

주요 선진국 중에서 한국과 같은 전세 제도가 있는 나라는 없다. 집값이 내려갈 때도 문제지만, 오를 때는 전세 끼고 집을 사는 '갭 투자'로 가격 상승을 부추긴다. 국내 전세보증금 규모가 1000조원이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제는 과도한 전세 거래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대비책을 마련할 때다.

김원배 논설위원 oneb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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