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눈 오는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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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숙 기자]
"뽁 뽀득, 뽁 뽀득" 오랜만에 눈을 밟으며 집까지 걸었다. '폭설 경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설마했는데 영화 한 편 보고 나왔더니 어느새 사방이 하얗다. 조용한 거리에 소리 없이 내리는 가는 눈발이 큰 어항 속 조명에 흔들리는 물 같다.
늦은 밤인데도 눈사람 만드느라 추위도 잊은 채 눈 뭉치는 가족, 주인을 뒤로 하고 멀리 어둠 속에서 두 귀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강아지도 보인다. 눈에 신난 건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렇게 많은 눈을 본 지가 얼마 만인가?
친구와 여수 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문화예술 활성화 연수 참석하고 저녁에 영화 <영웅>을 보기로 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죽기까지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그린 내용이다. 마침 전날 김훈 소설 <하얼빈>을 읽었던 참이다. 눈이 많이 온다고 했지만 조금씩 내리고 그치고를 반복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도 몇 번 희끗희끗 오다 말았다.
짱뚱어탕으로 저녁을 먹고 영화관에 갔다. 실내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꽉 찼다. 팝콘과 콜라까지 사 들고 자리에 앉았다. 여행사가 우수 고객에게 1년에 한 번 홍보 차원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란다. 고객인 친구를 따라왔다. 코로나 때문에 3년 만에 열린다고 했다. 힘들긴 했나 보다. 사장님의 안간힘이 보여 안타까웠다.
경품추첨이 있었다. 재수 좋게 당첨됐다. 뽑기가 나와는 거리가 먼데 별일이다. 꽤 비싼 노니 치약이다. 기분 좋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마스크 때문에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고 빈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 눈오는 밤 인적이 드문 눈오는 밤 겨우 시내버스를 탔다. |
ⓒ 최미숙 |
그런데 길이 미끄러웠다. 몇 년 전 눈길에 차가 돌았던 경험에 겁이 나 다시 주차장에 넣었다. 제법 많이 올 기세다.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시내버스를 타고 역에서 내려 집까지는 걷기로 했다. 마침 버스가 왔다. 손님은 우리뿐이다. 기사님께 태워줘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했다.
정류장에서 내렸다. 밤 열 시가 넘어서인지 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뜸하다. 다행히 무릎 담요를 챙겨 머리에 둘러썼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눈길엔 친구와 나 둘뿐, 주변이 점점 부옇고 앞이 희미하다. 조용한 적막을 뚫고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와 마스크 사이로 내뿜는 숨소리만 들린다.
가는 눈발이 함박눈으로 변했다. 가로수도 예고 없이 갑자기 앉은 눈 무게에 놀랐을 것이다. 하늘을 쳐다봤다. 까마득한 검은 하늘에서 수없이 떨어지는 흰 가루가 얼굴에 사뿐히 앉는다. 눈꺼풀이 떨렸다. 보이는 모든 것이 두꺼운 눈 이불을 쓰고 잠자듯 고요하고 깨끗하다. 어깨, 머리 위, 목도리까지 내려앉은 눈을 쳐 내다 이내 포기한다.
나보다 먼저 걸었던 사람 발자국을 빗겨 한 발짝 한 발짝 자국을 남겼다. 이 길을 걸었던 사람 모두에게 눈은 같지만 바라보는 마음은 제각각일 것이다.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진 속도 만큼이나 세상이 느려진 것 같다.
눈도 나이대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어릴 적엔 눈싸움하는 게 신났다. 고등학교 시절엔 눈을 보며 다가올 미래를 상상했고, 대학 시절엔 낭만을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먹을수록 그런 감정보다는 일 하나 늘어나는 게 귀찮아진다. 현관 바닥에 신발에 묻은 눈이 녹으면 닦을 일, 세차, 운전을 먼저 걱정한다.
자동차 아래에 맺힌 흙 묻은 지저분한 고드름이 눈에 띈다. 어릴 적 슬레이트 지붕 처마마다 맺힌 영롱한 고드름이 생각났다. 아침 햇살에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 부시도록 투명한 뾰족한 고드름도 우리 먹거리였다.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길게 맺힌 얼음덩이를 따 "우두둑" 베어먹던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동생들과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 둘러쓰고 누워있으면 저 멀리서 "메밀무욱, 찹쌀떠억"외치는 소리가 구성지게 들리기도 했다. 긴 겨울밤을 나는 간식으로 고구마 이상 없었다. 큰방 아랫목 구석에 자리한 고구마 가득한 상자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군것질거리가 부족한 그 시절, 밤늦은 시간 깎아 먹던 생고구마 맛을 잊을 수 없다. 가끔 군만두를 사서, 또 석작 가득 채워 둔 인절미를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추억이고 볼 수 없는 풍경이 됐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걷다 보니 벌써 집 앞이다. 둘러쓴 담요와 목도리가 눈 범벅이 됐지만 들어가려니 아쉽다. 그저 평범했던 이 길이 오늘은 눈이 마법을 부린 탓에 딴 세상이 됐다. 눈길을 걸으며 50년 전 추억을 떠올렸듯, 몇 년 뒤 눈 오는 날엔 오늘 이 느낌이 떠오르겠지. 그나저나 밤새 눈이 올 모양인데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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