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쇼 멸종의 시대, 라디오스타 장수 비결

이준목 2023. 1. 19. 14: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운맛→순한맛, 식상한 토크쇼 포맷의 한계 극복하는 데 성공

[이준목 기자]

MBC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가 지난 1월 18일로 800회를 맞이했다. 동명의 영화제목에서 영감을 얻어 2007년 5월 30일 <황금어장>의 한 코너로 방송을 시작한 <라디오스타>는, 2011년 10월 단독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고 첫 방송부터 1434명의 출연자를 만났다. 어느덧 현재 대한민국에 방송중인 최장수 예능 토크쇼의 명예를 안았다. 

<라디오스타>는 방송 초기만 해도 당시 전국민적인 화제와 인기를 누리던 강호동의 <무릎팍도사>에 가려진 보조 코너 취급을 받았다. 같은 프로그램내 코너임에도 <무릎팍도사>와 <라디오스타>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같은 식구끼리 '분량 경쟁'을 벌이는 기묘한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다.

실제로 <무릎팍도사>에 화제성있는 스타 게스트라도 등장했을 시에는 <라디오스타>의 방송분량이 더욱 줄어들며 5-10분 방송에 그치는 굴욕도 수 차례 있었다. <라디오스타> MC들은 대놓고 약육강식과 불안한 생존을 강조하며 방송 말미마다 '다음주에 만나요.제발~'이라는 클로징 인사를 날렸는데, 이는 <라디오스타>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디오스타>는 <무릎팍도사>와 <황금어장>이 모두 사라진 이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라 최근 방송가 환경이 달라지며 사실상 토크쇼 포맷의 프로그램들이 거의 대부분 멸종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라디오스타>가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예능 및 토크쇼 트렌드는 2000년대 후반부터 '자연스러운 리얼리티와 B급 정서' 위주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기존의 토크쇼들이 스타에 초점을 맞춰 출연자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연출하고 포장하는데 바빴다면,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대변하고 출연자를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어 웃음을 유발하는 공격적인 입담이 인기를 끌었다. <라디오스타>보다 앞서 대한민국 토크쇼의 간판 자리를 차지했던 <무릎팍도사> 역시 기존 토크쇼에서는 다루지 않던 게스트의 흑역사와 민감한 치부를 들추는 블랙 유머적인 요소로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었다.

<무릎팍도사>가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하여 출연자를 무대 중앙에 올려 영혼이 털릴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부하는 상황극이었다면, <라디오스타>는 게스트가 아닌 MC들이 중심이 되어 격식과 권위를 해체하고 짓궂게 뛰어놀게 만드는 마당놀이판이었다. 

출연자의 곤혹스러운 가십성 소문이나 출연 작품 비화를 주로 다루고, 게스트는 보릿자루처럼 내버려두고 MC들끼리 티키타카를 펼치기도 한다. 출연자들끼리 정글같은 토크배틀에서 알아서 분량을 챙겨야만 했던 것이 초창기 <라디오스타>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시 '독설가'로 이름을 떨치던 김구라와, 그 천적이자 애드리브의 귀재로 불리던 신정환이 있었다.

또한 2010년대에 접어들며 토크쇼는 점차 개인보다는 다수, 깊이보다는 재미, 무겁고 진지함보다는 가볍고 순발력 있게 이야기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변해갔다. 다수의 MC들이 다수의 게스트들을 초대해 중구난방으로 토크를 나누며 분량을 뽑아내는 이른바 '떼토크' 혹은 '토크 서바이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집단 토크에서는 하나의 인물이나 주제에 깊이 집중하기보다 당장의 화제와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MC가 게스트에 공격적인 질문을 하거나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하고, 분량이 안 나올 것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는 칼같이 끊어버리기도 한다. <라디오스타>는 <놀러와> <세바퀴> <강심장> <해피투게더>같은 프로그램들과 함께 이러한 '매운 맛 떼토크'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라디오스타>의 스핀오프이자 여성 버전인 <비디오스타> 역시 5년 이상 방송되며 높은 인기를 끌었다.

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방송 트렌드도 또다시 변했다. 떼토크와 독설은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자유분방하지만 나쁘게 보면 무례하고 예의가 없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라디오스타>는 도를 넘어선 독설와 출연자 비하 논란 등으로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렸다. 특히 간판이었던 김구라는 수차례 설화에 휩싸이며 뭇매를 맞기도 했다. 신정환과 김구가 과거 행적을 둘러싼 논란으로 하차했던 시기는 <라디오스타>의 최대 위기로 꼽힌다. 또한 토크쇼의 인기가 저물면서 집단 토크 시대를 대표하는 예능들은 <라디오스타>를 제외하면 대부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라디오스타>도 세월이 흐르면서 색깔이 많이 변했다. 예전같이 게스트를 몰아붙이거나 MC들끼리 서로 치고받던 공격성은 거의 없어졌다. 한 차례 방송 하차를 거쳐 복귀한 김구라가 비록 이후로도 몇차례 설화나 태도 논란은 있었지만 이제 독설을 하기보다는 '리액션' 위주의 MC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가끔 허를 찌르는 질문이나 빈틈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게스트의 성향이나 입담에 맞춰 완급을 조절하는 유연한 MC로 바뀌었다. 윤종신의 하차와 유세윤의 복귀, 여성 MC인 안영미의 가세 등으로 기존의 김국진-김구라와 함께 MC들의 진행스타일과 케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올드팬들은 이런 <라디오스타>의 변화를 꼭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스타> 특유의 매력이던 '촌철살인'이 사라지고 연예인-셀럽 출연자들의 자기 홍보와 신변잡기식 농담에 치중하는 평범한 토크쇼가 되었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4MC들이 서로 물고뜯으며 미묘한 자존심 경쟁을 벌이던 케미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원년멤버였던 MC 윤종신이 하차한 배경에도 프로그램의 재미가 떨어졌다는 자평이 있었다는 뒷이야기가 제작진의 언급을 통하여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김구라는 지난 2021년 방송 당시 한 게스트가 "예전 방송할 때와 비교하여 많이 순해졌다"고 언급하자 미소를 띄면서 "방송하는 사람들은 트렌드에 맞춰서 변해가야하는 게 당연하다"고 답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년을 달려오는 동안 <라디오스타>가 방송가에 미친 영향력이 희미해진 것은 아니다. <라디오스타>는 대한민국에 몇안남은 예능 토크쇼로 그 '희소성'을 인정받으며, 다양한 주제에 맞는 게스트 섭외와 조합, 철저한 사전 조사와 대본을 바탕으로 식상한 토크쇼 포맷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톱스타나 연예인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조연배우들, 각 분야의 인플루언서, 전문가, 일반인, 외국인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구성과 기획력은 여전히 <라디오스타>의 최대 강점이다. 지금은 대세가 된 박나래를 비롯하여 서현철, 김응수, 조나단, 조세호, 솔비, 황제성 등 <라디오스타>를 통하여 예능적 매력이 재발견되거나 새롭게 발굴된 예능 유망주들도 수두룩하다.

물론 급변하는 트렌드 속에 <라디오스타>가 앞으로도 얼마나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시작이 화려한 '비디오스타' 시대와는 상반되는 올드한 라디오식 토크의 재해석에서 비롯되었듯이 <라디오스타>도 이제 유행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시청자들의 '오래된 친구 '같은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이전보다는 순해졌지만 다른 토크쇼에 비하면 직설적이고 강렬한 색깔, 불편함을 주지않는 선에서 시청자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대신 질문해주는 <라디오스타>만의 스타일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