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K-우먼]해외서 이방인으로 고독…그림 그리며 단단해져
밑줄 치고 메모 하며 사유의 깊이 더해
오랜 부진 전인지, 실존지능 작품 한참 봐
작업실 찾아도 되냐는 물음에 '사제의 연'
3월 첫 뉴욕전시 "더 열심히 그릴 것"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제자를 둔다는 것은 영혼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다. 제자 두 명을 두지는 못할 것 같다."
‘메이저 퀸’ 전인지의 미술 스승 박선미 작가는 전인지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전인지만큼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또 만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지난 8일 오후 박선미 작가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다채로운 색깔의 앵무새를 주로 그려 ‘앵무새 작가’로 통한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큰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림 속 앵무새가 바로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박 작가는 다양한 인문학 서적을 읽은 뒤 느끼고 생각한 바를 앵무새 그림으로 풀어낸다.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언뜻 보기에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제목의 책들이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폴 오스터 ‘고독의 발명’, 슈테판 츠바이크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등. 그리고 따뜻한 향의 커피와 소담하게 준비된 빵이 있었다.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치열함과 주말 오후에 어울리는 커피와 빵의 여유로움이 이질적이었다. 상충된 치열함과 여유로움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작업실 공간을 꽉 채웠다. 전인지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묘한 충만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에 관심…인문학 관점에서 사유하고 그림 그려"
박선미 작가 작업실의 한쪽 공간에는 책장이 여럿이다. 어림잡아 100권을 훌쩍 넘을 듯싶었다. 집에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책이 많다. 집의 여러 벽면을 책장으로 채웠다. 모두 남편과 국내외 여행에서 모은 책이다. 남편은 아이티센 그룹 부회장 이성열씨다. 국내 1세대 컨설턴트로 IBM 글로벌 전기·전자산업부문 컨설팅 총괄대표, AT커니코리아 대표, SAP코리아 회장을 역임했다.
박선미 작가의 책은 인문학, 이성열 부회장의 책은 사회학으로 엇갈린다. 박 작가는 "철저하게 인문학 위주로 책을 읽는다. 인간에 관심이 많다. 책을 읽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사유하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부부는 경남 남해 아난티 리조트의 이터널저니 서점을 주기적으로 들른다. "큐레이션이 잘 돼 있다. 한 번 가면 며칠 동안 머물며 매일 서점에 들러 몇 시간씩 책을 읽고 그렇게 고른 책을 트렁크에 가득 담아온다." 해외 여행에서도 주목적지는 서점이다. 박 작가는 "해외 여행에서 모은 희귀한 책도 많다"고 했다.
박선미 작가는 책을 매우 꼼꼼하게 읽는다. 단어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는다. 밑줄도 치고, 필요하면 포스트잇을 붙여 메모도 한다. 박 작가는 "어지럽게 낙서가 돼 있어 도저히 책을 빌려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꼼꼼히 읽는 이유는 사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다. 활자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생각의 심연에 다다르고 그 결과물을 작가노트에 적고, 그림을 그린다. 매일 사유의 깊이를 더하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자신을 느끼고 더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셀프 크라우닝 뱀(Self Crowning Bam!)'은 작가가 2018년부터 계속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더 나은 나'가 되었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선물을 주듯 왕관을 하나씩 그려넣고 색깔을 덧입혀 그림을 계속 변화·발전시켰다. 애초 2018년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입시대 Ⅱ'라는 제목이었던 이 작품은 작가의 사유가 깊어지면서 전혀 다른 작품으로 진화했다.
"오랜 슬럼프 극복 전인지, 그림 그리며 단단해져"박선미 작가는 "전인지 선수가 그림을 그리면서 굉장히 단단해졌다"고 했다.
둘은 2021년 12월 처음 만났다. 박선미 작가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의 본화랑에서 개인전 '미, 마이셀프, 앤드 더 버드(Me, Myself, and the bird)'를 할 때였다. 개막 초대연이 있던 날 전인지가 화랑을 찾았고 '9번째 지능'이라는 작품을 1시간 동안 뚫어지게 바라봤다. "당시 본화랑 3개 층에 모두 작품을 전시했다. ‘9번째 지능’은 맨 아래 지하 1층 입구에 걸려 있었다. 2층까지 작품 설명을 1시간가량 하고 지하 1층으로 내려왔는데 전인지는 그때까지 계속 ‘9번째 지능’만 보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 인지교육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인간에게 언어·공간·신체운동 지능 등 최소 9개의 지능이 있으며 그중 9번째 지능을 실존 지능이라고 했다. 실존 지능은 나는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등 인간 존재와 삶의 근원적 가치를 추구하는 능력을 뜻한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서적 안정감이 높다.
박 작가는 "1시간 동안 같은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신기했다. 마스크도 쓰고 있어 전인지인 줄도 몰랐다. 얘기를 나누다가 실존 지능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했다. 전인지는 작업실을 찾아가도 되냐고 물었고 둘은 그렇게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지난해 5월, 스승과 제자는 연말 공동 전시 계획을 세웠고 전인지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달 출전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3년8개월 만의 우승, 메이저 대회 기준으로 7년9개월 만이었다. 긴 부진에서 빠져나오는 거짓말 같은 우승이었다.
전인지는 2015년 US오픈, 2016년 에비앙 챔피언십 등 메이저 대회에서 잇달아 우승하며 LPGA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2016년 LPGA 신인왕을 차지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출발을 한 만큼 높아진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전인지는 치열하게 앞만 보고 달려야 했다. 전인지에게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필요했고 그림이 그 역할을 해줬다. 전인지는 한때 골프를 그만둘까 고민했을 정도로 절망에 빠졌지만 이제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 올해 목표라고 말한다.
박선미 작가도 외국 생활에서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그림으로 치유했다. 남편의 해외 근무 때문에 박 작가는 해외 생활이 잦았다. "40대 후반인 2008년에 다시 해외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꼈다. 갑자기 뉴욕이라는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됐다. 그때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나는 왜 살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존의 의미를 종교에서도 찾으려 했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림 속에서 나의 실존지능을 발견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내가 그린 그림을 나누면서 나의 의미를 찾았고 전인지도 이번에 찾아낸 것이다."
스승과 제자는 지난해 12월 본화랑에서 '앵무새, 덤보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공동 전시를 했다. 덤보는 전인지의 별명이다. 전인지는 화가로서 처음 대중 앞에 섰다. "전인지가 작품 설명을 할 때 자신감이 넘쳤고 행복해했다. 너무 기쁘고 고마웠다."
'신세계로부터·피터 그라임스…' 음악에서도 영감…3월 뉴욕서 첫 전시
박선미 작가가 영감을 얻는 또 다른 원천은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다.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자주 듣는다. 모두 인간의 삶과 관련된 곡들이다. 합창은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노래한 4악장의 ‘환희의 송가’로 유명하다. 신세계로부터는 체코 태생인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3년간 머물 때 향수를 달래며 만든 곡이다. 곡을 만들던 당시 드보르자크의 마음이 박 작가가 뉴욕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때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다.
박 작가는 신세계로부터를 어렸을 때부터 들었다. "한국문화협회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항상 들었던 곡이다. 드보르자크의 선율을 좋아한다.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싶을 때 신세계로부터를 듣는다."
좋아하는 오페라 작품으로는 '아이다'와 ‘피터 그라임스’를 언급했다. 아이다는 뮤지컬로도 제작돼 유명하지만 피터 그라임스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의 작품으로 그라임스는 영국 동해안 작은 어촌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가난한 어부다. 그라임스와 관련된 소년들이 잇달아 죽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살인을 의심한다. 그라임스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끝내 마을 사람들은 그라임스에게서 등을 돌린다. 오페라는 어느날 새벽 배가 침몰했고 그 배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그라임스가 있었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박 작가는 "피터 그라임스를 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깊어진다"고 했다.
박 작가는 오는 3월 뉴욕에서 첫 전시를 한다. 미국, 특히 뉴욕은 낯설지 않은 곳이다. 그의 작품 속 색이 화려한 이유도 오랜 미국 생활과 무관치 않다. 박 작가는 "미국에서 살 당시 미국 미술계는 화려한 색상의 팝아트가 주류였고 무의식 중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박 작가는 "아트엑스포 뉴욕 2023에서 약 20점을 전시한다. 전인지 선수와도 계속 작업을 할 계획이다. 더 열심히 그려야 한다"고 했다.
▶박선미 작가는
1985년 홍익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82년부터 5년간 KBS 제1라디오 구성작가로 활동했다. 미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아이를 키우며 1995년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2008년 남편의 해외 근무로 미국 뉴욕으로 가기 전까지 12년간 목판화를 공부했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 등에서 수강하며 미술 공부를 계속 했고 2011년 귀국 후에는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크릴, 색연필, 오일 파스텔 등 다양한 재료로 화려한 색깔의 앵무새를 주로 그려 '앵무새 작가'로 불린다. 2018년 전업 작가로 변신해 매년 개인전을 열고 있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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