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 변제' 꺼낸 윤 정부에 묻는다 "누가 죄인인가?"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을 대라면, 안중근이 "누가 죄인인가?"를 외치며 이토 히로부미의 열다섯 가지 죄목을 읊는 대목을 손꼽을 것이다.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부터 동양의 평화를 철저히 파괴한 천인공노의 죄까지, 그가 피 토하듯 쏟아내는 분노의 함성은 보는 이의 가슴마저 끓어오르게 한다.
그 장면이 아니었다면, 결말이 뻔한 '국뽕' 영화로 치부됐을지도 모르겠다. 재판정의 기록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저 국수적인 반일 감정에 기댄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인 설희(김고은 분)와 마진주(박진주 분) 등의 가상 인물을 등장시킨 영화적 상상력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영화를 관람한 뒤 며칠 동안 비장한 멜로디에 실린 "누가 죄인인가?"라는 말이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 심지어 식사 중에도 무심결에 흥얼거리기도 했다. 아이들조차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시도 때도 없는 내 흥얼거림에 반갑다는 듯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도 <영웅>의 포효에 감동하셨군요?"
▲ 정부, '강제동원 피해 간접보상' 공식화 정부가 일본 기업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3자로부터 판결금을 대신 변제받는 것이 가능하다며 향후 수령에 동의를 구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해 피해자들이 이 방안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사진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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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죄인인가?"
시나브로 잊혀가던 이 말이 다시 머릿속에 되돌아온 건, 최근 화제가 된 어처구니없는 뉴스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게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손해 배상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알기 쉽게 요약하면, 국내 기업 등이 출자해 일본의 가해 기업을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겠다는 거다.
지난 2018년 대법원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국제법상 불법이며, 일본 기업의 조선인 강제 동원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님을 명토 박았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가해 기업의 배상 책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책임을 다하도록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는 한편, 대법원의 판결을 철저히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게도 구럭도 다 잃는' 최악의 선택지를 뽑아 들었다.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주상 같은 대법원의 확정판결 내용조차 서슴없이 무력화시켰다. 줄곧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을 거슬렀다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의 적반하장식 입장을 우리 정부가 대변하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정부의 입장은 간명하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니, 어쩔 수 없이 우리 정부라도 나서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위해 우선 배상하는 게 옳다는 것. 끝까지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하나 마나 한 외교적 수사일 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우리 국민은 아무도 없다.
가해자가 큰소리 떵떵 치고, 피해자가 되레 주눅이 들어 쩔쩔매는 모습에 우리 국민의 자존감에 크나큰 생채기가 났다. 당장 아이들조차 대한민국의 위상이 고작 이 정도냐고 물을 지경이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 기업이 저지른 악행을 똑똑히 보고도 그들에게 배상 책임조차 묻지 못한다면, 과연 독립된 나라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정부가 내세운 배상 절차도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일본 정부와 기업에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인 양 옴짝달싹도 못 하면서, 우리 기업에는 출자를 종용하며 엄포를 놓고 있다. 출자 대상으로는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종잣돈 삼아 설립된 굴지의 국내 기업의 이름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배상금이 아닌, 경제 지원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차관 2억 달러를 받고 한일 간 조약에 합의했다. 굴욕적인 외교라며 대학생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국민적 저항이 잇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의 요구에 베트남 전쟁에까지 파병하는 무리수마저 뒀다. 돈과 민족적 자존을 맞바꾼 참혹한 시대였다.
우리 기업들이 모금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지원 재단'을 꾸려 피해자들에게 대납하는 모양새다 보니, 그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정부가 대놓고, 이유야 어떻든 일본의 '덕'을 봤으니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졸지에 국내 기업들이 '의문의 1패'를 당했다.
▲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일본 전범기업 배상책임, 왜 한국이 지나’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 유성호 |
항소와 상고의 절차까지 거쳐 대법원의 판결까지 나온 마당에 정부가 저토록 일본의 눈치를 보며 굽신거리는 까닭은 뭘까. 굳이 지원 재단을 꾸려 모금할 필요도, 이렇듯 시간이 지체될 이유도 하등 없다.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대로 국내에 있는 가해 기업의 자산을 강제 집행하면 된다.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은 그 어떤 사과나 배상도 하지 않겠다고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마당이니, 오로지 해법은 강제 집행 하나뿐이다. 더욱이 우리 기업들로부터 모금된 기부금을 배상금이랍시고 흔쾌히 받을 피해자도 거의 없다.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그들 역시 바라는 건,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이다.
강제 집행은 이미 최악으로 내몰린 한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반론이 이 와중에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에게서 선선히 나오고 있다. 적극적인 외교로 풀어야 할 사안이라는 뜻이다. 온갖 외교적 노력에도 일본의 완강한 거부로 어쩔 수 없이 '제3자 변제'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으면서, 다시 외교 운운하는 건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든, 위안부 피해자든, 불행했던 과거사 해결 문제로 인한 한일 두 나라의 외교적 갈등은, 명토 박건대, 일본에 그 책임이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 참혹한 고통을 안긴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값이자 출발선이다. 정부와 여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이는 외교적 노력은 그다음이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우려된다거나 연이은 북한의 무력 도발에 맞서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에 아이들조차 콧방귀를 뀌고 있다. 보복이 두려워 가해자의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학교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되묻는다. 또, 북한의 도발과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엮는 건, 과거사에 색깔론을 뒤집어씌우는 행태라고 손가락질한다.
과거사 성찰 능력을 상실한 일본 정부의 뻔뻔함에는 허공에 대고 주먹질만 하면서, 애꿎은 우리 국민을 향해 '현실론'만 떠들어대는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가 너무나 굴욕적이다. 일본 정부의 몽니와 우리 정부의 무능으로 대법원의 위상을 넘어 대한민국의 헌법조차 초라해져 버렸다. 아이들의 분노를 담아 다시 묻노니, 정부는 답해보라.
"누가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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