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곳 없는 열여덟 살 아이,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김성호 기자]
▲ 열여덟, 어른이 되는 나이 포스터 |
ⓒ 필름다빈 |
의도치 않게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럴 때 나서 '미안하다' 사과하고 문제를 바로잡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나 혼자만의 잘못은 아닐 때, 이곳 생리가 본래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면 쉽게 사과가 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그러한 집단의 말단 직원일 뿐이라면 어떻게 용기를 내 문제를 바로잡자 말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누군가는 사과하고 문제를 바로잡는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귀한 일이다. 미안하다고 말하여 상한 마음을 다독거리고, 문제를 바로잡아 제 책임을 다한다. 그것이 마땅히 어른이 지녀야 할 자세는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 열여덟, 어른이 되는 나이 스틸컷 |
ⓒ 필름다빈 |
보호종료아동, 그들은 누구인가
최근 수년 간 보호종료아동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호종료아동이란 아동양육시설이나 공동생활가정, 가정위탁을 퇴소한 이를 가리킨다. 이제 막 대학을 진학할 나이에, 혹은 그보다 어린 나이에 사회로 나가 제 삶을 꾸려야 하는 돌아갈 곳 없어진 아이들이 곧 보호종료아동이다.
부모며 친척이며 기댈 곳이 없어 시설에 입소했던 것일텐데 얼마 되지 않는 지원금을 쥐어주고 이제부턴 너 혼자 살라고 내모니 적응이 쉬울 리 없다. 적잖은 보호종료아동이 자립에 실패하고 방황하는 것도 이 같은 제도적 허점에 기인한다. 지자체 등이 나서 생활비 등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고는 있지만 보다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 열여덟, 어른이 되는 나이 스틸컷 |
ⓒ 필름다빈 |
서로가 서로를 물들인다는 것
영화는 생업의 기반인 킥보드를 잃어버린 보호종료아동과 그에게서 연민과 울림을 얻게 되는 윤서가 서로 교감하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준다. 다소 투박하게 빚어진 캐릭터 탓에 설득력이 없는 에피소드도 적지는 않지만 어쨌든 두 인물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스스로도 바뀌어나가기 시작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제법 놀라운 것이어서, 그들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서로에게 제 색을 물들이고 제게는 상대의 색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인간은 성장하게 되니 처음엔 결코 닮아갈 수 없었던 두 세계가 마침내는 교우하는 신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 열여덟, 어른이 되는 나이 스틸컷 |
ⓒ 필름다빈 |
완성도는 아쉽지만 의미 있는 시선
기실 수없이 반복돼온 쌍방의 성장드라마는 결국 차별화가 관건이 될 것인데, <열여덟, 어른이 되는 나이>가 그와 같은 개성이며 내실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보호종료아동의 고충을 그나마 접근하여 들여다보려 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찾기는 어려운 작품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시선은 그 자체로 가능성을 내포한다. 누구는 결코 보려하지 않는 곳에, 다른 누군가의 시선은 반드시 머물고야 마는 것이다. 그 차이가 전혀 다른 작가를 만들어내기도 하니 나는 주영이라는 감독에게 은근한 기대를 품고야 만다.
영화를 보며 생각하게 된다. 나의 열여덟은 영화 속 수찬이 졌던 무게를 지고서 견뎌낼 수 있었을까를. 우리 중 몇도 헤어나지 못할 그 삶의 무게를 왜 우리는 우리 중 가장 약한 자에게 부여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그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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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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