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노인봉 등산로에서 느껴본 화전민의 자취

이기원 2023. 1. 19. 09: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기원 기자]

▲ 진고개 주차장 진고개 탐방로 입구 오대산 노인봉 등반이 시작되는 지점
ⓒ 이기원
 
우리 나이로 60이 되었다. 벌써 60이라니? 순식간이란 생각도 들지만, 죽을 고비도 있었던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어떻게 살았을까?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다. 맨 앞에 앉아 칠판 글씨가 안 보일 정도로. 오징어 게임, 비석 치기, 땅따먹기 등 운동장에 금 그어놓고 놀던 놀이가 많았던 그 시절, 그어놓은 금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터라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책에 매달렸다. 책조차도 부족했던 시절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동네 형, 누나가 쓰던 교과서, 만화책, 학교에서 판매하던 어깨동무, 어린이 자유 등....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그림일기, 일기, 반공 글짓기, 웅변 원고.

4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어이쿠 싶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는 원주 인근 산을 올랐다. 치악산, 감악산, 명봉산, 덕고산, 태기산, 어답산, 운무산, 독재봉, 오대산, 노인봉, 구봉대산, 계방산, 제비봉, 발왕산. 등산하면서 산에 담긴 역사와 유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진고개 고위평탄면 1960년대까지 화전민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진고개 고위평탄면. 오대산 국립공원에 포함되면서 야생화 군락지가 되었다.
ⓒ 이기원
뭐 하나 잘한다고 내세울 만한 건 없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건 꾸준히 좋아했다. 치열하게 매달린 건 아니어서 특기랄 수도 없는 취미 정도다. 위암 판정 후 시작한 등산도 마찬가지다. 100대 명산 등반을 꿈꿀 정도는 아니고, 여건과 형편 닿는 만큼만 올라가자 다짐한다.

60 나이가 되었다고 달라질 건 별로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처럼 살아갈 테니까. 그래도 마음속 다짐은 한다. 꾸준히 산에 오르고 책도 읽고 글도 쓰자. 산 이야기, 책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씨줄과 날줄 삼아 글로 엮어가 보자. '산·책·글'이란 타이틀 걸고.

올해 처음 찾은 산이 오대산 노인봉이다. 평창 대관령면과 강릉 연곡면을 연결하는 진고개 정상에서 탐방로로 올라가면 광활한 고위평탄면이 펼쳐진다. 해발 1000m 고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공간이다. 철 따라 갖가지 야생화가 군락을 이룬다는데 겨울이라 볼 수 없어 아쉽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배추밭 등으로 이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화전민들이 살던 곳으로 알려진다.
 
▲ 노인봉 등산로 고위 평탄면을 지나 가파른 계단길을 10여 분 올라가면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등산로 따라 1시간 30분 정도 올라가면 정상에 도착한다.
ⓒ 이기원
화전민, 전란, 수탈, 재해 등으로 농경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불을 놓고 그 땅을 경작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다. 화전민들이 겪어야 했던 애환이 고려가요 청산별곡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유유자적 청산에 사는 게 아니라 머루와 다래로 부족한 식량을 채울 수밖에 없는 화전민의 현실을 나타낸 작품이다. 삶터에서 밀려나 산속에 들어와 화전민이 되었지만, 굶주림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새 울음소리에 감정이입 해서 함께 울고, 자신들이 경작하던 산 아래 농경지를 바라보며 슬픔에 잠긴 고려시대 화전민들의 애환이 눈물겹게 그려지고 있다.

삼정의 문란이 극심했던 조선 후기에도 화전민이 늘어났다. 매관매직에 탐닉하던 세도 권력과 부패한 관료들은 전정, 군정, 환곡을 앞세워 무자비한 수탈을 일삼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혹한 세금과 고율의 소작료를 감당하기 힘들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는 농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 노인봉 정상 화강암으로 형성된 정상 모습이 먼 데서 보면 백발 노인 같다고 해서 노인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과, 노인 심마니가 산삼 캐는 꿈을 꾸고 이곳에 올랐다가 실제로 산삼을 캤다고 해서 노인봉이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이기원
화전민이 되면 일시적으로 관리들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불을 놓아 개간한 땅은 지력이 약해 불안정한 생계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산짐승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했다. 밀려난 산속에서도 불안정한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다. 이들을 명화적이라 불렀다.

불붙인 솜방망이를 들고 한밤중에 마을로 들어와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명화적이 가장 많이 출몰했던 때가 세도정치 시기였다. 일부 명화적들은 빼앗은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을 일컬어 의적이라 불렀다.

1945년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도 화전민이 있었다. 해방,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삶터에서 밀려난 농민과 실업자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기록원 통계에 의하면 1965년 말 현재 화전민은 7만 500호, 42만 명이었고, 화전 면적도 4만 ha였다고 한다.

5.16 군사 구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임산자원 보존과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화전민들을 한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키고 정리하는 화전 정리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1979년까지 이어진 화전 정리사업으로 전국에 산재했던 화전민은 대부분 없어졌다. 그 많던 화전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노인봉에서 바라본 전경 정상에서 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전경으로 황병산, 소황병산 등이 보인다.
ⓒ 이기원
고위평탄면을 지나면 본격적인 등산로가 나타난다. 완만한 등산 코스로 누구나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는 정보만 믿고 룰루랄라 오르다 보니 숨이 턱에 찬다. 10분 정도 올라야 하는 계단 때문이다. "힘들지 않은 산은 없어"라던 친구 말이 생각났다. 맞는 말이다. 오르지 못할 산도 없겠지만,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산도 없다.

힘든 계단 길을 넘어서니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봄날 기분이 느껴진다. 햇살에 살짝 녹아 미끄러운 등산로 따라 1시간 정도 걸어가니 노인봉 정상과 소금강 분소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0.2km 올라가니 노인봉 정상이다. 백발노인을 닮았다는 화강암 암릉을 오르면 황병산, 소황병산, 오대산, 설악산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