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슬램덩크 세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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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만이'였다.
물론 친구의 멀쩡한 이름 대신 "백호야"라고 불러줬을 때에만 그 친구도 "대만아 왜?"라고 화답했다.
슬램덩크는커녕 점프를 해도 림의 그물망에 손끝이 닿을까 말까 했지만 17살 우리들은 백호이자 대만이었고, 태웅(이 이름을 차용한 친구들이 욕을 가장 많이 얻어먹었다)이와 치수, 그리고 태섭이었다.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보다 외모와 실력 어느 것 하나 나은 것 없었지만 흘린 땀만큼은 그들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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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만이’였다. 물론 친구의 멀쩡한 이름 대신 “백호야”라고 불러줬을 때에만 그 친구도 “대만아 왜?”라고 화답했다. 슬램덩크는커녕 점프를 해도 림의 그물망에 손끝이 닿을까 말까 했지만 17살 우리들은 백호이자 대만이었고, 태웅(이 이름을 차용한 친구들이 욕을 가장 많이 얻어먹었다)이와 치수, 그리고 태섭이었다.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보다 외모와 실력 어느 것 하나 나은 것 없었지만 흘린 땀만큼은 그들보다 많았다. 만화 속 북산고처럼 농구팀이 없었기에 화산처럼 폭발하자며 ‘볼케이노’란 이름의 농구 서클을 만들었지만 유니폼은 맞추지 못했다. 용돈도 부족했거니와 멋들어진 유니폼을 입고 뛸 마루 코트도 없었기 때문이다. 밤 11시 야자(야간자율학습)가 끝난 뒤에 한 번 넘어지면 피가 철철 나던 아스팔트 운동장의 골대를 향해 슛을 던진 뒤에야 집으로 향했던 시절이었다.
30년이 흘러 어느새 반백의 중년이 된 ‘대만이’는 지난 주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러가자는 말에 중학생 딸은 친구도 이미 ‘태섭이’ 아빠에게 끌려갔다며 피하지 못할 운명을 받아들였다. 원작 슬램덩크 만화책을 봤던 1970년대생이 주축인 아저씨들이 최근 리메이크한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 개봉 2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아저씨들은 자막판과 더빙판 중 어떤 것을 봐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2개 다 보면 된다’는 답변에 ‘우문현답’이라며 즐거워한다.
7080세대는 왜 이 영화에 흥분할까.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다가올 미래에 비춰 꿈많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인 듯싶다. 주변에 비슷한 연배를 만나보면 우울한 감정을 호소하는 이들이 꽤 있다. 40대 중반의 한 공무원은 지난달 월급의 절반 가까이가 아이들 학원비로 나갔는데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쓴 돈을 계산해보니 10만원도 안 되는 것 같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들은 20년 넘게 열심히 일했는데 적자인생이 끝날 줄 모른다. 노후를 위해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50대가 되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한 시중은행은 만 55세가 된 지점장 중 70%가량 연봉이 깎이는 임금피크제를 피해 보직을 유지할 수 있는 ‘아너스(honors·영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100세 시대’가 다가오는데 고작 55세 넘어 일할 수 있는 게 영광이 되는 시대에 ‘슬램덩크 세대’는 끼어 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슬램덩크 주인공들은 종료 5분을 남기고 고교 랭킹 1위 산왕공고에 20점 차 이상 뒤지고 있다. 작전타임을 부른 감독은 “포기하는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라고 말한다. 부상을 당해 뛸 수 없는 처지로 몰린 백호는 교체를 지시하는 감독에게 “감독님의 영광의 시간은 언제였죠. 저는 지금입니다”라며 코트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백호의 마지막 버저비터(경기 종료를 알리는 경보음과 동시에 던지는 슛)가 들어가면서 극적인 1점 차 역전승을 거두면서 영화는 끝난다.
나를 포함해 꼰대 아저씨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다가 끝내는 운다. 영광의 시절이 지나간 것 같은 아쉬움과 앞으로 그런 시절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그래도 삶이라는 거대한 코트에서 슬램덩크 세대는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다. 5반칙 퇴장을 당해 코트를 떠나든, 버저비터가 림을 맴돌다 들어가지 않든 말이다.
원작자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최근 시네21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님의 영광의 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선택지가 없다. 항상 ‘지금’이다.” 인생의 전반전을 막 마친 슬램덩크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이성규 경제부장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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