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이병기와 야치가 안 보인다
#1 인천공항에 내린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장은 활주로에 대기하던 승용차 뒷자리에 서둘러 올라탄 뒤 다리를 쭉 뻗어 몸을 눕혔다. 혹시라도 언론에 얼굴 사진이 찍힐까 우려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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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자 대위변제 '얼개' 마련했으니
이제는 정치로 '징용담판' 이끌어야
'성의있는 호응' 없이 마무리는 안돼
」
차량이 향한 곳은 3분 거리 P호텔. 수행 담당은 후나코시. 현재 강제징용자 배상 협상 책임자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다.
방에 대기하던 우리 측 인사는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위안부 합의를 위해 두 사람은 2015년 여덟 차례나 그렇게 만났다.
당시에도 표면적 협상 창구는 양국의 외교부 국장이었다. 이상덕 동북아국장과 이하라 당시 대양주국장이 12차례나 만나 협상했다.
하지만 벽에 막힐 때마다 정치적 결단은 이병기-야치 라인에서 결정됐다.
당초 일본이 제시한 위안부 기금 규모는 4억7000억 엔가량이었지만, "어중간하게 그게 뭐냐. 내 집 팔아 돈을 보태도 좋다"는 이병기의 채근에 10억 엔이 됐다.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놓고는 합의 바로 전날 밤까지 험한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담판은 빨랐고,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대통령·총리로부터 거의 전권을 위임 받고, 실시간 의사소통이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 강제징용자 배상 협상은 2015년 위안부 협상 때와 공통점·차이점이 공존한다.
먼저 공통점. 한국 측이 더 서두른다. 특히 대통령이 가장 급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일수교 50주년(2015년) 내에 끝낼 것을 재촉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마찬가지. 속도전을 지시하다 초반부터 상대방에게 '패'를 읽혔다. 아쉬운 대목이다.
결정적 차이점도 있다. 위안부 협상 때는 앞서 언급한대로 정치가 밀고 당기기를 했다.
그래서 어찌 됐건 ▶일 정부의 책임 인정 ▶일 총리 사죄와 반성 ▶정부 예산을 통한 배상이 거의 녹아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 징용자 협상에선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관료에게 떠넘긴다. 한마디로 이병기와 야치가 안 보인다.
한데 위안부 합의 파기란 아픈 기억이 있는 양국 외교 관료들은 문구 하나하나에 토를 달고 책임을 피한다.
특히 일 외무성 핵심 간부들은 거의 모두 까다로운 조약국 출신. "한국이 잘해주고 있다"고 손뼉 치면서도 절박함을 총리에게 전하진 않는다.
핵심은 이게 정말 절박한 문제라는 걸,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걸 기시다 본인이 느끼게끔 압박하는 데 있다. 그게 정치의 영역이다.
#3 한국 기업의 돈으로 대신 원고에 배상하는 이른바 '제3자 대위변제'안이 어렵게 마련됐다. 일종의 얼개다. 이 얼개를 채우는 건 이제부터다.
일본 유력 정치인을 만나고 미국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만, 결국은 우리 정치가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기시다를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 담판을 짓든, 가장 신뢰하는 참모에게 특사 전권을 주고 마무리를 짓게 하든 뭐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자, 2018년 대법원 판결과 1965년 청구권 협정과의 충돌을 해결할 법적 타협안은 우리가 욕먹으며 이렇게 마련하지 않았느냐. 이걸 화해와 타협으로 이끄는 정치적 결단은 당신 몫이다. 나와 함께 털고 가자"라고 압박해야 한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로 하여금 기부금이건, 성금이건 단돈 100엔이라도 내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움직일 수 없다며 얼굴 붉히고 싸워야 하고, 일본 피고 기업이 사과하지 못하겠다면 일 정부가 짧게라도 사과문을 내놓으라고 다그쳐야 한다.
그래야 기시다도 움직이고, 절충이건 타협이건 가능해진다. 결과는 다음 문제다.
우리 지도자, 우리 정치가 이런 '과정상'의 노력조차 제대로 안 하고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면 그건 강제징용 피해자들, 돈을 내는 우리 기업, 그리고 대승적으로 지켜본 우리 국민에 대한 직무유기다.
한국 일각에선 '협상 조기 종결, 2월 윤 대통령 방일'을 띄우는 모양이다. 모르는 소리. 도쿄는 2월의 매화 철도 좋지만 3월의 벚꽃, 4월의 등나무꽃이 더욱 좋다. 2월의 설익은 매화 열매는 약한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진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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