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반토막 난 무딘 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지난 13일 이창용 한은 총재는 향후 기준금리 동결 가능성에 대해 “지금부터 동결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답을 내놨다. 불확실한 물가 상황이나 미국과의 금리 차 등을 고려했을 때 인상 여지를 남겨두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기준금리 인상에 역주행하는 예금과 대출금리를 보면 이 총재가 굳이 금리 경로에 관해 설명을 내놓을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중은행의 예금금리는 지난해 말부터 수직 낙하 중이다. 채권 시장이 안정돼 은행채 금리가 내려가며 예금금리도 덩달아 내려갔다는 설명이 붙지만, 금융당국이 과도한 예금금리 경쟁 자제령을 내린 게 주된 요인일 것이다. 대출금리 인하도 본격화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18일 주택담보대출 등의 금리를 최대 1.3%포인트 내렸다. ‘금융소비자의 이자 부담 완화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마침 이복현 금융감독원이 지난 13일 “과도한 대출금리 상승으로 인해 가계와 기업이 부담이 큰 점을 개별 은행들이 살펴봐 달라”고 말한 후다.
한은 안팎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온다. 통상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예금과 대출금리가 따라 오른다. 가계와 기업은 대출을 덜 받게 되고 이자 부담이 늘어나 소비가 줄어든다. 무딘 칼인 금리 인상으로 물가를 잡는 방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통화정책의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경제 주체들이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효과에 의심을 품게 되면 물가 안정도 요원해진다.
은행들도 난감할 것이다. 은행의 본질은 ‘이자 장사’다. 그런데 지나친 이자 장사를 하지 말라고 하니, 적당한 선에서만 장사하는 묘를 찾아야 한다. 매달 돌아오는 예대금리차 공시가 딱 그렇다. 예대금리차에서 2~3등을 하는 게 목표라는 소리도 들린다. 예대금리차가 시중은행 중 가장 크면 금융당국의 압박이 부담스럽고, 예대금리차가 너무 낮으면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가계의 은행대출은 2조6000억원 감소했다. 한국은행이 관련 통계를 작성한 2004년 이후 18년 만의 첫 디레버리징(부채축소)이다. 그런데 ‘선량한 관치’를 앞세운 정부 덕에 디레버리징은 지난해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대출금리가 내려오고 있는 데다, 대출금리가 급하게 오르면 정부가 다시 금리를 내려줄 것이라는 학습효과도 생겼다. 그동안 한국이 한 번도 제대로 된 디레버리징을 맞이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안효성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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