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한·미동맹 공동 목표는 결국 전쟁 억지에 있다
‘음모론’ 잠재우는 사전협의의 중요성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역사가에게도 가장 눈길을 끄는 주제 중 하나가 음모론이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다고 할까. 때로 문서들이 공개되어 음모가 역사적 사실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음모론은 역사적 자료로 증명되지 않기에 ‘음모’가 아닌 ‘의심’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미관계와 관련해서도 수많은 음모론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큰 전환점이 있을 경우 그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했다. 5·16 쿠데타나 10·26 사건과 같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발생하는 사건뿐만 아니라 4·19혁명과 광주민주항쟁처럼 사회적 거대전환이 있을 때도 미국의 힘이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곤 했다. 물론 아직 명확한 증거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회자하였던 음모론은 한국전쟁 개전과 관련된 남침유도설과 북침설이었다. 이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북한만의 주장이었지만, 일부 급진적 수정주의 학자들이 제기하였다. 이 음모론은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의록을 포함한 구소련 문서와 북한군으로부터 획득한 노획문서가 공개되면서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면서 폐기되었다.
■
「 5·16, 10·26 등 격변기 배후에 “미국 있다”는 음모론은 증거 없어
1967년 청와대 습격, 1976년 도끼만행 사건 등서 한·미갈등 고조
미국의 일관된 목표는 북한의 도발 막고 전쟁 억지력 확보하는 것
한반도 긴장감 높아진 지금 한·미 간 긴밀한 협조 더욱 중요해져
」
“한국의 북에 대한 보복은 안 된다”
그런데도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의해, 또는 군산복합체를 위해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음모론은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이 계속될 경우 한국·일본·타이완과 이 지역에 주둔한 미군을 위해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무기 판매처를 지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실제로 한반도에서의 갈등과 위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일까.
1967년 10월 31일 정일권 총리가 베트남에서 미국의 험프리 부통령을 만났다. 험프리는 “한국 정부의 북에 대한 보복 행동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로 대담을 시작했다. 정일권은 한국에 대한 군수지원을 늘려 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험프리는 “만약 우리가 지원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언제까지 한국의 정규군을 도와주어야 하는가”라고 답했다.
험프리의 답에 깜짝 놀란 정일권은 베트남 전쟁 상황으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미국의 반전 시위에 대해 언급했다. 한국에서 사람들을 보내 반전시위를 막을 수 있다고. 그러나 험프리의 입장은 완고했다. “남한은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돌발 행동을 할 것인가. 대통령에게 미국의 뜻을 전해 달라.”
“한국이 희생자가 돼야 외국서 지원”
1967년에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남북 간의 안보위기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1968년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이었다. 북한은 남한의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 대남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부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보복 공격으로 맞섰다. (중앙일보 2022년 2월 17일자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참조)
동년 11월 13일 신임 최규하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 러스크 국무장관을 만났다. 최규하는 베트남 한국군의 속옷을 한국 제품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러스크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대답도 없이 “어떤 충돌이 일어나도 한국은 침략의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라면서 ‘이것이 미국을 비롯한 많은 외국 정부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만이 보복 공격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직후 미국도 보복 계획을 수립한 적이 있었다. 이 계획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첩보부대를 북한 지역에 파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은 1968년 2월 9일자 태평양 사령부에서 미 합동참모본부장에게 보내는 문서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계획은 이미 1963년에 실행했던 첩보 침투작전이 50% 이하의 성공률밖에 보이지 못했다는 점, 1965년부터 1967년 사이 침투작전이 1건만 성공했다는 점, 한국군에 의해 단독으로 수행된 6건의 침투작전이 북한의 침투작전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계획이 북한의 안보 능력을 더 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 때문에 폐기되었다.
전쟁 억지력으로서의 작전통제권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의 상황도 비슷했다. 두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자 미국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에 데프콘3이 발령되었고, 폴 버니언 작전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경우에 대응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전면전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유엔군의 승인 없이 한국군의 단독작전으로 인한 갈등은 이미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존재했다. 70년 전 반공포로석방은 그 대표적 사례였고, 이후 한·미 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언급되었다. 아직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지는 않은 상황이지만, 1983년 아웅산 사건,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때에도 한·미 간에 유사한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개된 미국의 대한정책 문서를 보면 군사 부문에서의 목표는 명확하다. 우선 북한에 의한 도발을 막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유엔군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는 한국군의 반격을 막는 것이다. 한국군의 반격이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늘리면서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공개된 미국의 정책문서를 보면 미국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를 통해 더 이상 큰 비용을 치르지 않겠다는 점을 궁극적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주한미군과 한국군 작전통제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억지력(deterrence power)이다. 군산복합체에 의한 음모론은 실상 자료 속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전협의 없으면 미국은 침묵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초기 동남아시아에 한국군을 파병하겠다고 미국에 요청했고, 베트남 전쟁 말기에는 한국군을 베트남 대신 캄보디아나 태국에 파병하겠다는 제안도 했다. 1970년대 초 오키나와 일본 반환이 확정되었을 때 오키나와의 전략 자산을 제주도로 옮기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혀 답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 시기 안보와 관련된 한국 정부의 제안은 주한미군과 한국군을 감축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크게 보면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안보 정책을 돕겠다는 한국 정부의 제안이었다. 이승만의 전기에 나오는 언급처럼 “미국보다 더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의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것은 사전협의였다.
사전 협의를 통해 서로가 갖고 있는 능력과 목표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사전에 협의가 없었던 이슈에 대해서 미국은 침묵을 지키거나 이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한국 정부의 1970년대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관련된 미국의 핵심 문서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부정적 반응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오판의 근거를 만들어주지 말아야
어쩌면 사전 협의는 비단 한·미관계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한국이 주변국 모두와 협의하고 사전 논의가 이루어졌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더라도 사전에 논의를 해준다면, 그로 인한 불쾌감도 줄어들고 절교까지는 가지 않는 게 친구 간의 신뢰와 의리가 아닐까.
지금 남북관계는 안보 딜레마를 넘어선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가장 중요한 안보 축으로 한다면, 한·미 간 사전협의와 긴밀한 협조는 더더욱 필수적인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나타나고 있는 상황은 사전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동맹국이나 우방 국가 사이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주변국의 판단이 우려된다. 북한과 같이 비정상적 정부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헷갈리는 '부부의 세계'...'남편 수상해' 폰 몰래 보면 무죄? 유죄? | 중앙일보
- “내 남편의 바람을 고백합니다” 이래야 아옳이가 돈을 번다 | 중앙일보
- 영국팬 80% “선발서 빼라”…손흥민, 정말 괜찮은거야? | 중앙일보
- [단독]한동훈 "'변태들의 마을' 봐라"…간부들에 꺼낸 다큐 2편 | 중앙일보
- 죽어서도 냉장고에 방치됐다…치매 아버지 사망 전 '악몽의 넉달' | 중앙일보
- "시한폭탄 깔고 앉은 14억명"...인구로 中 제치는 인도의 고민 | 중앙일보
- "군 신체검사 1급인데, 경찰 채용 탈락" 꿈 잃은 색약자의 눈물 | 중앙일보
- 주인은 카드 쳐다봐서 싫어요...알바 편의점만 가는 결식아동 | 중앙일보
- '연 판매 0대' 현대차 굴욕? 수입차에 PHEV 안방 내준 속사정 | 중앙일보
- 목숨 걸고 무단횡단해야 갈 수 있다…유족 울린 '위령비 비극'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