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생존…사랑에 울던 그녀들, 이젠 독해졌다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한 말이다. ‘더 글로리’는 배우 송혜교 주연으로 공개된 지 2주가 넘도록 OTT 통합 콘텐트 랭킹 1위(1월 2주차 키노라이츠)를 차지하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학교 폭력의 표현 수위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의 복수에 대한 집념과 치밀한 실행 과정이다.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가 사랑에 눈물 짓고, 가족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하던 건 오래 전 일이다.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이끌어가는 ‘여성 서사’가 갈수록 강렬해진다. 지난해 ‘작은 아씨들’, ‘슈룹’(이상 tvN), ‘글리치’(넷플릭스) 등에 이어, 송혜교의 ‘더 글로리’, 이보영의 ‘대행사’, 전도연의 ‘일타스캔들’ 등 원톱 여주인공을 내세운 작품들이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고현정(넷플릭스 ‘마스크걸’), 김희애(넷플릭스 ‘퀸메이커’), 이나영(웨이브 ‘박하경 여행기’), 엄정화(JTBC ‘닥터 차정숙’) 등 대표 여배우들이 드라마로 속속 복귀하는 만큼 여성 서사 대세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요즘 드라마 속 여성 주인공에게는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더 글로리’ 문동은(송혜교)에게 그것은 복수다. 학교 폭력 피해자인 문동은은 가해자들을 향한 복수를 촘촘하게 계획하고 실행해간다.
JTBC 토일 드라마 ‘대행사’의 고아인(이보영)에게는 직장 광고대행사에서의 생존이 전부다. 그는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직장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매일 매일 전투를 치른다. 늘 제일 먼저 출근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밤샘을 불사하고, 안일한 팀원들에게는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는다.
지난 14일 시작한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남행선(전도연)은 딸처럼 키운 조카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남동생을 돌보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핸드볼 국가대표 자리도 포기하고 고군분투한다.
이러한 여성 서사의 배경엔 사회적인 문제 의식이 깔려 있다. ‘더 글로리’에서는 학교 폭력, ‘대행사’에서는 직장 내에서 좀처럼 깨지지 않는 여성의 유리 천장, ‘일타스캔들’에서는 치열한 사교육 경쟁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겉으론 강인해 보이는 여성 주인공들도 거대한 사회 문제 앞에서 상처 받고 흔들린다. 침착하게 복수를 계획하던 ‘더 글로리’ 문동은은 학교 폭력 가해자 전재준(박성훈)을 만나고 온 뒤 트라우마로 인해 화장실에서 구토를 한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대행사’ 고아인은 불안 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퇴근 후 술과 신경안정제를 함께 먹어야 간신히 잠이 드는 위태로운 캐릭터다. 만능 혹은 무적의 주인공 모습만 부각하기보다 내면의 갈등과 외부 장애의 극복 과정을 그려내며 대중의 공감과 응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여성 서사 드라마가 많아졌다. 기득권인 남성보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여성 서사로 사회적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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