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보다 무서운 ‘엔데믹’
‘엔데믹 블루’에 빠진 한국 경제
“코로나 때보다 지금이 몇 십 배는 더 힘들다.”
서울 용산구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강민철 씨(가명)는 최근 폐업을 고민 중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도 폐업을 생각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는 더 못하겠다”고 털어놓는다. 손님이 없어도 빚을 내며 매장을 유지한 그를 지탱해온 것은 ‘희망’이었다. 코로나만 끝나면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지금의 수고를 다 보상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경기 침체와 대출 이자 부담으로 그 믿음이 꺾여버렸다고. 강 씨는 “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지원은 끊겼다. 손님이 조금 늘면 뭐 하나. 재룟값과 인건비가 오른 데다 금리까지 치솟다 보니, 매달 이자 갚기도 버겁다”고 한숨 쉬었다.
비단, 강 씨만의 일이 아니다. 자영업자에 한정된 얘기도 아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는데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드는 기업이 수두룩하다. 회복할 것으로 여겼던 내수 시장은 도리어 꽁꽁 얼어붙었다. 모두가 품고 있던 희망. ‘코로나만 끝나면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처참히 꺾여나가는 모습이다.
새로운 유형의 ‘엔데믹 블루’다. 기대했던 정상으로의 회복이 어려워지면서 우울한 감정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가전·가구·바이오·언택트 등 코로나 팬데믹 수혜를 입던 기업은 오히려 파티가 끝났다. 이는 고스란히 경기 상황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종욱 서울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기대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는 코로나 이후 경기 침체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안 했다. 하지만 요즘 경제 상황이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흘러가면서 오히려 더 큰 위기가 찾아온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매경이코노미는 엔데믹 블루의 실상을 살펴보기 위해 2021년과 2022년(3분기 누적 기준) 국내 상장 기업 실적 변화를 전수 조사했다. 통계 착시를 막기 위해 조사 대상은 2021년 매출 3000억원 이상 기업 563개로 범위를 좁혔다. 563개 기업을 대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접어든 2022년 사이 매출과 영업이익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봤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563개 기업 중 전년 대비 매출이 감소한 기업은 61곳, 영업이익 감소 기업은 226곳에 달했다. 해당 리스트에 어떤 업종이 많이 분포돼 있는지 살펴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위기를 맞이한 기업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증권사 실적 반 토막…건설사도 ‘도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증권사의 부진’이다. 매출 감소율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결과 상위 10개 기업 중 8개가 증권사다. 11위 미래에셋증권과 12위 교보증권까지 포함하면 상위 12개 기업 중 10곳이다.
1위 유안타증권(-51.8%)은 매출이 반 토막 났다. 대신증권(-45.4%), NH투자증권(-44.7%), 이베스트투자증권(-44%), DB금융투자(-39.5%), 삼성증권(-36.3%)도 비슷한 상황이다.
2022년 3분기 누적 기준 유안타증권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87.5%를 기록했다. 매출 감소 상위 6곳 증권사의 평균 영업이익 감소율은 -69.4%다. 이에 따라 ‘증권사 영업이익 1조 클럽’도 자취를 감추게 될 전망이다. 2021년 역대급 실적에 힘입어 한국금융지주, 삼성증권,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키움증권 등이 1조 클럽에 등극한 바 있다.
증권사 실적 부진 이유는 명확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풀렸던 막대한 유동성이 회수되면서 시장이 위축된 탓이다. 팬데믹 기간 경기 부양을 위해 각국 정부가 찍어낸 돈은 결국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돌입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는 금리를 인상했다.
증권사 입장에서 시장 내 유동성 축소는 당연히 치명적이다. 주식 시장이 부진하면서 거래대금이 급감했고 채권 금리 상승으로 채권 발행 역시 부진하면서 증권사 주 수익원인 수수료 수입도 덩달아 줄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전체 유가증권 시장 일평균 거래대금은 2021년 15조4242억원에서 2022년 9조119억원으로 40% 넘게 급감했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2분기 이후 급격히 줄었다. 2분기 9조7923억원에서 3분기 7조5876억원까지 쪼그라들었다. 여기에 레고랜드 사태에서 촉발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유동성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내외 리스크가 추가 악재로 작용했다.
유동성 축소 타격을 입은 것은 증권사뿐 아니다. 부동산 시장에 돈이 마르면서 건설사 위기도 심각하다. 지난해 9월 충남 지역 종합 건설 업체 우석건설이, 뒤를 이어 지난해 말에는 경남 지역 시공능력평가 18위인 동원건설산업도 부도가 났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종합 건설 업체 5곳이 최종 부도 처리됐다. 롯데건설 등 대형 건설사마저도 그룹 내 계열사로부터 자금을 긴급 수혈받는 등 위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대출과 투자를 늘린 기업도 부담 백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중소기업대출은 전년 대비 15% 늘어난 1480조4000억원에 달했다. 팬데믹 기간 이어져왔던 정부 금융 지원책이 종료되면서 한계 기업이 줄줄이 도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새로운 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은 유동성 축소다. 팬데믹 기간 통화 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 이후 여기 대응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경기가 침체됐다. 한동안은 금리가 과거처럼 떨어진다는 걸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향후 2~3년간은 위기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고 쌓이는 가전, 키트 부진 바이오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혜를 입었던 기업도 위기다. 높이 올라갔던 만큼 추락도 더 뼈아프다.
‘집콕 수혜’를 입은 업종 대부분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위기를 맞이했다. ‘가전’이 대표적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TV·냉장고·에어컨·공기청정기 등 가전제품 교체 수요가 급증했다.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 ‘수요 절벽’에 직면하면서 기업마다 안 팔린 제품이 창고에 쌓여가는 실정이다.
당장 삼성전자와 LG전자부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악성 재고 부담으로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가전 공장 평균 가동률을 낮췄다. LG전자 가전 유통 채널인 ‘하이프라자’는 최근 희망퇴직을 시행하고 나섰다.
중소 가전 기업인 위니아와 위닉스는 2022년 3분기 누적 기준 매출이 전년 대비 각각 21.4%, 20% 줄었다. 매출 3000억원 이상 상장사 중에서 14번째, 15번째로 큰 매출 감소폭으로 증권사를 제외하면 나란히 4·5위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 역시 위니아는 적자전환, 위닉스는 74.8% 감소했다.
가전 부진은 자연스럽게 부품 산업 부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장비 기업 원익IPS 매출은 2021년 3분기 누적 기준 1조603억원에서 지난해 6916억원까지 쪼그라들었다. 감소율은 -34.8%로 증권사를 제외하면 모든 상장사 중 가장 높다.
이 밖에 자외선 광반도체(UV LED) 세계 1위인 LED 전문 기업 서울바이오시스가 매출 감소폭이 큰 기업 전체 17위(-17.2%), 프리미엄 가전용 LED를 공급하는 서울반도체도 22위(-12.4%)로 부진이 두드러졌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양 사 모두 적자전환했다.
LG디스플레이는 모든 상장사 중에서 매출 감소폭이 큰 기업으로 나타났다. 2022년 3분기 누적 매출이 18조8502억원으로 전년(21조715억원) 대비 2조2214억원 감소했다. 두 번째로 큰 매출 감소폭을 보였던 SK네트웍스(-9905억원)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다.
집콕 수혜가 끝난 것은 ‘가구업계’도 마찬가지다. 침대업계 1위인 에이스침대는 지난해 3분기 기준 영업이익이 20% 넘게 감소하는 등 10년 만에 역성장 위기를 맞이했다. 2위 시몬스는 최근 안정호 대표를 포함한 임원진 16명 전원이 연봉 20%를 자진 삭감하며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한다고 선포했다. 김진태 한샘 대표는 지난해 6월부터 본인 급여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삭감하는가 하면 서울 상암동 사옥 매각으로 유동성 확보에도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배달도 성장동력을 잃었다. 거리두기 해제로 외식 수요가 늘어나면서다. 배달 앱 사용자 수가 급감했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2021년 12월 905만명에 달했던 요기요 월간 순 사용자 수(MAU)는 1년이 지난 2022년 12월 690만명까지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쿠팡이츠 MAU는 702만명에서 385만명으로 반 토막 가까이 났다.
자영업자에게도 물론 타격이 있다. 특히 팬데믹 기간 ‘생존’을 위해 배달 전문 매장으로 전환한 자영업자들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21년 배달 전문 매장 창업 이후 최근 폐업했다는 김지은 씨(가명)는 “배달 장사는 워낙 마진이 박해 많이 팔아야 남는 구조인데,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이후 배달 콜 수가 반 토막으로 줄었다. 여기에 원재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다 보니 견디기가 어려웠다”며 한숨 쉬었다.
‘바이오’ 업종도 부진을 면치 못하는 중이다. 진단키트와 의약품 판매 호조로 급성장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PCR 검사 전문 기업인 씨젠은 2022년 3분기 누적 기준 매출이 전년 대비 23.9%, 영업이익은 61.3% 감소했다. 종근당홀딩스도 매출이 줄어든 기업 리스트에 포함됐다. 매출은 3.1% 감소, 영업이익은 적자전환했다.
장성철 가톨릭대 글로벌미래경영학과 초빙교수는 “코로나 시기 급격하게 성장한 기업은 마치 ‘빙하기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과 같은 처지가 돼버리고 말았다. 팬데믹 국면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가전·가구와 바이오, 그리고 코로나 특수를 누렸던 화상 회의 서비스 등 비대면 언택트 시장은 올해 역성장 위기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3·설합본호 (2023.01.18~2023.01.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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