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 인턴과 다를 바 없는 스무살의 일하는 마음
[최문희, 고정미 기자]
평범하게 먹고사는 사람의 탈을 쓰고 싶었다. 틈틈이 부모에게 돈 부치고 양말을 기어 신어도 우여곡절을 겪었음을 티 내지 말자. 그 탈을 벗지 말자. 주위 사람들이 너를 변방으로 밀어낼 테니까.
사회초년생을 지난 무렵부터 나의 일부 감정을 변방에 두었다. 가난한 집안의 맏딸 중에는 유머러스한 사람도 많지만 나는 유머를 밥 말아 먹었고 차라리 덤덤해졌다. 대신 나와 닮은 듯 다른 변방에서 궤적을 그린 사람들의 노동기를 읽는 버릇을 들였다.
이 글은 변방에 관해 함부로 말하는 이가 자기 경험을 반추하며 안방에 들어가듯이 쓴 서평이다. 연재를 통해 우선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하는 '문지방'을 만나고자 한다. 그다음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나의 지금을 번갈아 보아 온기를 데우는 '아랫목'에 앉고자 한다. 끝으로 책 속 공감의 문장을 모은 '이부자리'를 깔고자 한다.
[문지방] 일을 시작하는 마음, 들여다본 적 있나요?
▲ 책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허태준 지음, 호밀밭, 2020 |
ⓒ 호밀밭 |
작가는 시에 대한 열망으로 일찍이 청소년기를 지새운다.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한다. 그리고 가고 싶었던 예고 대신 부모의 부담을 덜고자 마이스터고 진학을 택한다. 열아홉 살이던 해 9월부터 회사에 입사해 기계 설비를 고치는 일을 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업무일지를 쓰고 공구에 관한 요약 노트를 만들어 프로가 되고자 몸을 곧추세운다.
특성화고 학생들을 주제로 다룬 언론 기사를 살펴보면 현장실습생의 고통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 상사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환경에 내몰렸다거나 미숙련공의 안타까운 사고 직후 유족의 슬픔을 조명하는 경우도 흔하다. 어린 노동자의 비극적 표현에 함몰하지 않은 책(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만났을 땐 다양한 색을 가진 친구를 마주하는 것처럼 반가웠다.
"회사에서는 하루하루가 시험 기간 같았다. 작업장에 있을 때는 기계 사용법은 물론이고, 공구의 위치, 현장에서 사용하는 명칭, 가공 시에 재료마다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뭔지, 또 자주 말썽을 일으키는 기계와 대처 방법을 수첩에다 빼곡히 썼다."
그는 업무 공책을 탑 쌓듯 쌓았다. 공책 한켠에는 후배에게 가르쳤던 업무를 정리하고 업무 시 강조해야 할 점과 개선점들을 기록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안전을 위한 마음도 정비했다. 그렇게 지새운 저녁은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는 인턴의 저녁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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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
[아랫목] '세상 빡세게' 일하는 스무 살에게도 취미가 있습니다
작가는 대학을 다니는 친구를 따라 그리스 비극을 다룬 스터디에 동석하기도 한다. '공부 꽤나 하는' 이질적인 세계에 관해 "생각보다 훨씬 기득권"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 경험을 영화 <설국열차>의 세계관에 비유하기도 한다. "저게 하도 오래 닫혀 있으니까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라고 외치는 남궁민수(송강호 배우)의 대사를 복기하며 모종의 닫힌 사회적 문을 골똘히 탐구한다.
철학을 논하는 세계로 외출하고 돌아온 뒤 그는 땀내 나는 현실로 복귀한다. 동료와 전세 자금 대출과 적금 현황을 공유한다. 꼬박꼬박 집에 돈 부치는 선배와 자기 삶의 모양을 들여다본다. 돈을 벌기 위해 일찍 시작한 일의 세계에서 서로의 사정을 나누며 "돈이 전부가 아님"을 자각한다. 잃어버린 시간과 공허를 깨닫기도 한다. '자녀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며 부모의 입장을 담담히 헤아리기도 한다.
열아홉 가을 무렵, 나는 입사한 회사에서 업무를 익히기 위해 퇴근 후 OJT일지(on-the-job training education journal, 하루 동안의 OJT교육내용을 기록한 문서. 교육 대상자의 성명과 소속, 직급 등을 정확히 기재하고 당일의 교육사항을 요약하여 간결하게 약술)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분주했다.
몇 개월간 아득해진 밤마다 집 대문을 열었다. 당시는 주5일제 시행이 정착되지 않았고 학교 필수 출석일을 채우는 조건으로 16일 동안 쉬는 날 없이 일했다. 열아홉 겨울, 방문을 잠그고 가족이 잠든 걸 확인한 후 목놓아 울었다. 명랑하고 시원하게.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을 들키면 부모의 마음이 무너질 거라고 확신했다. 눈을 꾹꾹 누르며 욕실로 직행한 날도, 월급을 항목별로 나누며 계산기를 두드리던 날에도 꼬박꼬박 삶의 유희를 찾았다. 메밀국수를 나눠 먹기도 하고 배낭여행도 떠났다.
작가는 일본 여행 기록을 책에 담았다. 도쿄의 꼬칫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청년의 삶엔 일만 있지 않았다. 작가는 일을 끝내고 노곤하게 밥상 위에 한숨을 내려놓는 이국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사는 풍경에서 안심을 배운다.
"가끔 동생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오늘은 어디 공사현장에 다녀왔다, 저기 세워진 전봇대 내가 작업했다, 뿌듯하게 말할 때가 있어. 그러면 애틋한 마음이 드는데, 그게 참 싫어. 동생이 자기 일에 가지는 자부심을 나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어."
책 끄트머리, 친구 S가 작가에게 쓴 편지글 중 한 토막이다. 읽으면서 자랑스러워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월급통장 말고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면 일하는 사람의 흔적이 우리 삶 가까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누군가를 호명하는 기쁨을 언제든 누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도, 작업복 위에 교복을 입고도 누구든 힙해질 수 있다. 글을 쓸 때마다 타인에게 준 상처를 발견한다는 작가에게서 누군가의 명함과 이름이 빛나는 풍경을 본다. 열아홉 작은 사람의 시간을 담은 큰 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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