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왕자 아닌 망나니 필요해요"…사랑에 울던 그녀들 변했다

어환희 2023. 1. 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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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학교 폭력으로 영혼이 산산조각 난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말한다. 그가 ‘왕자님’이 아닌, ‘망나니’를 원하는 이유는 학폭 가해자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얘기다. 배우 송혜교 주연으로 공개된 지 2주가 넘도록 OTT 통합 콘텐트 랭킹 1위(1월 2주차 키노라이츠)를 차지하며 뜨거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학교 폭력의 표현 수위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의 복수에 대한 집념과 치밀한 실행 과정이다.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가 사랑에 눈물 짓고, 가족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하던 건 오래 전 일이다. 요즘은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들이 매해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해 '작은 아씨들', '슈룹' (이상 tvN), '글리치'(넷플릭스) 등에 이어, 올해는 더욱 강렬한 ‘여성 서사’가 연초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송혜교를 비롯해 이보영(‘대행사’)·전도연(‘일타스캔들’) 등 원톱 여배우들이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는 우리 사회가 곱씹어봐야할 화두를 던지며, 작품의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1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 시즌2 스틸컷. 넷플릭스


여성 서사, 멜로 넘어 사회적 문제에 접근


요즘 드라마 속 여성 주인공에게는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더 글로리’ 문동은(송혜교)에게 그것은 복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극 중 대사처럼 학교 폭력 피해자인 문동은은 가해자들을 향한 복수를 촘촘하게 계획하고 실행해간다.

JTBC 토일 드라마 ‘대행사’의 고아인(이보영)에게 직장인 광고대행사는 전쟁터다. 가진 것이라곤 오로지 실력과 근성 뿐인 그는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직장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매일 매일 전투를 치른다. 늘 제일 먼저 출근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밤샘을 불사하고, 안일한 팀원들에게는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는다.

지난 14일 시작한 tvN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남행선(전도연)은 딸처럼 키운 조카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남동생을 돌보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핸드볼 국가대표 자리를 포기하고 사고사한 엄마를 대신해 반찬 가게를 운영한다. 젊은 시절 남들 다 하는 연애도 사치로 생각하며, 실질적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tvN '일타스캔들'에서 18년 만에 로맨틱코미디로 복귀한 배우 전도연은 반찬가게 사장이자 '입시맘'이 된 전직 핸드볼 국가대표, 남행선 역할을 맡았다. tvN


이러한 여성 서사의 배경엔 사회적인 문제 의식이 깔려 있다. '더 글로리'에서는 학교 폭력, '대행사'에서는 직장 내에서 좀처럼 깨지지 않는 여성의 유리 천장, '일타스캔들'에서는 치열한 사교육 경쟁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겉으론 강인해 보이는 여성 주인공들은 거대한 사회 문제 앞에서 상처 받고 흔들린다. 침착하게 복수를 계획하던 '더 글로리' 문동은은 학교 폭력 가해자 전재준(박성훈)을 만나고 온 뒤 트라우마로 인해 화장실에서 구토를 한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대행사' 고아인은 불안 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퇴근 후 술과 신경안정제를 함께 먹어야 간신히 잠이 드는 위태로운 캐릭터다.
하지만 이들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장애를 극복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만능 혹은 무적의 주인공 모습만 부각하기보다는 내면의 갈등과 외부 장애의 극복 과정을 그려내며 대중의 공감과 응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여성 서사가 드라마의 주를 이룬 것은 꽤 오래됐지만, 과거에는 사랑 이야기에 많이 머물렀다면 지금은 사회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작품이 훨씬 많아졌다”고 말했다.
“기득권인 남성보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여성 서사로 사회적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JTBC 드라마 '대행사'에서 배우 이보영은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커리어 우먼 고아인을 연기한다. JTBC

드라마 여왕들의 연기 변신


강렬한 여성 서사가 대세를 이루는 데는 드라마 여왕들의 연기 변신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주로 로맨스물에서 만날 수 있었던 송혜교는 첫 복수극 ‘더 글로리’를 통해 연기력을 입증했다. 미국 포브스는 “송혜교의 미묘한 연기가 K-복수극을 완성했다”고 평했다.
'대행사' 이보영 역시 첫 오피스물에서 목표지향적이고 전투적인 캐릭터를 맡으면서 연기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 방영된 4화 시청률은 8.9%(닐슨코리아, 유료가구 전국 기준)로 10%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일타스캔들'의 전도연은 '프라하의 연인'(2005) 이후 18년 만에 밝고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로 돌아와, 가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생활력 강한 여성을 그려내고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여성 서사에 대한 여성 시청자들의 관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고, 특히 중년 여성 스타들이 등장하면 주부층이 많이 공감하며 본다”면서 “이같은 시청자들의 니즈(수요)가 있기 때문에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현정(넷플릭스 ‘마스크걸’), 김희애(넷플릭스 '퀸메이커'), 이나영(웨이브 '박하경 여행기'), 엄정화(JTBC '닥터 차정숙') 등 대표 여배우들이 OTT와 TV 드라마로 속속 복귀하는 만큼 여성 서사 대세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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