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매일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윤일희 2023. 1. 1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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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패터슨> (짐 자무쉬 감독, 2017)

[윤일희 기자]

영화 <패터슨>를 보다 딸애와 나는 졸았다. 영화는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담은 얘긴데, 딸애는 금요일쯤에서 나는 목요일쯤에서 졸았다. 졸다 놓친 요일의 패터슨이 궁금해서(사실 궁금할 내용이랄 것은 없지만, 카메라가 세심히 좇는 그의 미세한 진동을 유심히 보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다시 봤다. 졸았다고 하니 이 영화가 엄청 재미없겠다 싶겠지만, 아니다. 신기할 만큼 단조롭지만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왜 졸았냐고? 글쎄... 둘 다 견딜 수 없는 오후의 식곤증이 밀려왔달까, 아니면 거실로 쏟아져 들어온 보드라운 햇빛이 노곤하게 만들었을지도.

나는 패터슨 류의 이런 사람(자신의 삶의 지향을 부단히 추구하는 유형)을 알고 있다. 비비안 마이어. 평생 보모나 간병인으로 살며 단지 사진에만 자신의 여분의 시간을 투여한 사람. 가족도 없이 독신으로 살다 거의 노숙자 처지로 죽은 사람. 이런 사람에게 흔히 따라붙는 '불쌍하다'는 세간의 생각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그가 남긴 15만 장에 달하는 사진들은 그가 평생 얼마나 열심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분발한 사람에게,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집념을 가진 숨겨진 예술가에게, 그저 가족이 없어서, 이름을 알리지 못해서, 가난하게 살다 죽어서, 외롭거나 불행한 사람이었을 거라 단정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보는 것도 좋겠다.
 
 영화 <패터슨>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들을 추앙할 수밖에 없는 이유

패터슨은 물론 비비안 마이어와 다른 사람이지만, 나는 그를 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안다는 것, 조건 없이 몰두한다는 것,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이 없다는 것 등 삶의 지향을 알고 행하고 지킨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들을 추앙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패터슨은 매일 똑같은 시간 오전 6시 15분에 요란한 알람 없이 눈을 뜬다. 잠든 아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옷을 들고 방을 나가 시리얼로 아침을 해결한다. 여기까지의 패터슨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가 시리얼을 먹다 평범한 성냥갑을 만지작대며 시상을 떠올리느라 미간을 모으는 장면에선, 그의 특별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매일 시를 쓴다. 패터슨 트랜짓의 버스 기사 패터슨은 시인이다. 아내를 제외하곤 그가 시인인 것을 아무도 모르는 숨은 시인이다. 흔한 성냥갑을 보고 아내를 향한 사랑의 시를 짓는 특별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다. 시인의 눈과 귀는 사람과 사물 그리고 풍경을 향해 언제나 예민하게 열려있지만 티 내지 않는다. 버스에 탑승한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 혼자 슬며시 웃기도 귀를 쫑긋하기도 한다. 재잘대는 아이들, 거들먹대는 남자들, 소란스런 여자들의 대화 속에서도 문득 시상이 맺어질지 모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패터슨은 버스를 운전한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출퇴근한다. 매일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다듬는다. 매일 저녁 아내와 밥을 먹고 매일 밤 반려견을 산책시킨다. 산책은 단골 술집의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한다. 왁자지껄한 하루를 보내고 소란이 일상인 사람에겐 상상하기 힘든 지루한 하루일 테고 당연히 보기 어려운 영화다.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패터슨의 평정한 매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딸애와 나는 경의를 담아 고민해 봤다. 물론 그의 개인적인 성향과 하루를 출렁거려 넘치지 않도록 조율하는 노력은 기본이니 논외로 하고, 외부적 요인 한 가지씩을 내놓았다. 딸애는 휴대폰을, 나는 배우자 로라를 꼽았다.

패터슨이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딸애의 주장은 일리 있다.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사는 딸애에게 세상은 곧 휴대폰의 세상과 일치한다. 엄청난 곡해고 딸애도 그렇다는 것을 알지만, 번번이 인터넷의 이미지에 포획 당한다. 생각을 잡아먹히고 물건을 받기도 전에 후회하는 쇼핑을 이어간다. 관계없는 사람들의 매일을 엿보고 공유하고, 또 엿보고 또 공유하느라 도무지 고독이나 고요함이 끼어들 틈이 없다. 타인이 어딜 가서 뭘 보고 뭘 먹고 뭘 사는지 과도한 이미지 속에 떠다니다 익사할 지경이지만,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고 다시 헤엄치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삶이고 멋지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이런 딸에게 패터슨의 평정심이 단연 휴대폰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유추하는 것은 자기 성찰적이다.

나는 기혼이고 좀 산 사람으로서, 그리고 휴대폰에 아직 잡아먹히지 까지는 않은 사람으로서, 패터슨 평정심의 수훈을 배우자 로라에게 돌리고 싶다. 패터슨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남자지만 로라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여자다. 탐구적이고 창의적이고 의욕적이고 게다 사랑스럽다.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혀 짧은 소리 내는 애교와는 전혀 다른 공감과 이해와 성숙의 이타심이다. 욕심 없는 남편을 한심해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쓴 시를 고대하고 그가 낭송하는 시를 상찬한다.
 
 영화 <패터슨>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패터슨은 매일 시를 쓰고 그녀는 매일 뭔가를 만든다. 커튼이나 옷을 재봉하고 페인팅해 독특한 것을 만들어낸다. 모드 루이스처럼 집을 마치 화판으로 여기고 곳곳을 색칠하기도 한다. 마을 장터에 내다 팔 컵케이크에 진심이고 아직도 무궁히 솟아나는 열정이 있다. 자신의 매일이 만족하고 행복하다. 남편의 벌이를 타박하지 않고 자신이 장터에서 번 285달러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해한다. 나는 그녀의 무해함이 패터슨의 평정을 지켜주는 핵심이라고 믿는다. 한 집에 사는 가족 특히 배우자가 달갑지 않아 하는 재능은 절대 평화롭게 구가되지 않는다.

감독이 선물한 빈 노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하루에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이들이 외출한 사이 반려견이 패터슨의 비밀노트(시작 노트)에 못된 짓을 벌인 것이다. 패터슨은 크게 낙담한다. 그의 분신일 수도 있는 노트를 잃었으니 상심이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날아간 글을 복구해 보려 한 사람은 안다. 한번 사라진 글은 절대 재생되지 않는다.

적잖이 타격받은 패터슨에게 감독은 작정하고 선물을 제공한다. 어쩌면 동화적 장치 같기도 한데, 이방인을 등장시켜 빈 노트를 건넨다. "텅 빈 페이지가 가장 큰 가능성"이라며 그를 격려한다. 공책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는 패터슨,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이방인이 당신도 시인이냐고 묻는 질문에 패터슨은 수줍게 아니라고 답한다. 패터슨에게 시는 곧 삶이고 삶이 곧 시지만, 그는 굳이 자신을 시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에겐 단지 자신이 시를 쓰는 것이, 시를 쓸 수 있는 삶이 있을 뿐이다. 세간의 속물적이고 뻔뻔한 시인들처럼, 시가 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하느니 젠체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시를 완성한다. 시를 쓰며 타인을 제물 삼지 않고 타인을 도구화하지 않는다. 타인을 조롱하거나 혐오함으로 상처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감각에 집중해 시를 쓴다. 무해한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쓴다.

딸애와 나는 패터슨의 시인됨과 그의 평정심에 조용히 공명했다. 고요한 영화를 보고 시끄럽게 감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딸애가 휴대폰을 처박거나 내가 갑자기 시를 쓰는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고요한 일상이, 이를 지킴이, 짧은 낮 동안 함빡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매일 세상에 지는 것 같아 속상하다면, <패터슨>을 권해보고 싶다. 얼마간이라고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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