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지도자가 대표팀 맡으면 왜..." 박항서가 던진 의문

이준목 2023. 1. 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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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평가 풍조'와 협회 지원 등에 아쉬움 토로

[이준목 기자]

▲ 태국과 미쓰비시컵 결승 2차전 앞둔 박항서 감독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16일(현지시간) 태국 빠툼타니주 클롱루앙군 탐마삿 스타디움에서 2022 아세안축구연맹(AFF) 미쓰비시일렉트릭컵(미쓰비시컵) 결승 2차전 태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이날 베트남은 태국에 0-1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2017년 10월 베트남 지휘봉을 잡고 5년여 동안 이끌어온 박 감독은 이달 말 계약이 만료된다.
ⓒ 로이터/연합뉴스
 
베트남과 5년가량의 동행을 아름답게 마친 박항서 감독이 한국축구의 현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고언을 전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박 감독은 지난 1월 17일 오후 비대면으로 진행된 영상 기자회견에서 향후 자신의 진로와 한국축구의 미래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밝혔다.

박 감독은 향후 거취를 고민 중이라면서도 국내에서 지도자나 행정가로 일할 생각은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큰 성공을 거두며 명망이 높아지면서, 일각에서는 파울루 벤투 감독이 떠난 차기 축구대표팀 사령탑 후보나 혹은 대한축구협회 임원직으로 물망에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박 감독은 "한국에는 나보다 훌륭한 후배, 동료들이 많다. 특별히 내가 한국에서 현장에서 할 일은 없다. 5년간 한국을 떠나있어서 현장감도 떨어진다"며 손사래를 쳤다. 또한 "해외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 행정가를 하기도 어렵다. 국내에서도 축구협회나 프로축구연맹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나는 행정 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한편으로 박 감독은 "분명한 건 앞으로도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이라면서 아직 축구계 은퇴는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 대표팀 감독직에서는 물러났지만 현지에서는 유소년 축구와 관련된 제안들을 많이 받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학원 스포츠와 유소년 아카데미가 발전한 한국에 비하면, 베트남의 유소년 축구 인프라는 아직 미약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박 감독이 새롭게 도전해볼 만한 영역이다.

또한 박 감독은 한국과 베트남을 제외한 아시아의 제 3국에서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안이 오는 경우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놨다. 박 감독은 카타르월드컵에서 지켜본 개최국 카타르를 예로 들며 "월드컵을 경험한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은 차이가 있다. 카타르 대표팀을 보면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족하지만 그런 팀에서 불러준다면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여운을 남겼다.

박항서 감독이 본 한국축구의 현 주소

가장 주목할 것은 박항서 감독이 '외부자'의 시선에서 한국축구의 현 주소를 평가한 대목이다. 박 감독은 베트남 대표팀 시절에는 한국축구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지만, 이날은 홀가분하게 자신의 소신을 가감없이 밝혔다. 특히 해외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한국 지도자로서, 박 감독은 '국내 지도자들이 외국인 감독에 비하면 저평가되는 풍조'에 강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축구계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벤투 감독이 물러난 이후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이다. 박 감독은 "감독을 선임하는 협회의 위원회가 보는 시각은 나와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분명한 건 우리 지도자들도 역량이 있다. 단지 왜 협회에서는 국내 지도자가 대표팀 감독직을 맡으면 외국 감독만큼 지원해주지 않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부분만 해결되면 국내 지도자들도 충분히 대표팀을 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감독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활약하여 4강신화에 기여했고, 같은 해 열린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23세 이하 대표팀 사령탑을 맡기도 했다. 한국축구에서 외국인 감독과 국내파 감독 두 체제의 차이점과 장단점을 모두 경험해본 인물이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박 감독은 히딩크 감독을 줄곧 지도자로서 롤모델로 이야기할 만큼 존경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본인이 감독이 되었을 때는 국내파 지도자에 대한 '역차별 논란'의 희생양이 되어 본 경험도 있다. 박 감독은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에 실패하며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고 이후 다시는 대표팀에서 기회를 얻지 못 했다.

프로축구계에서 감독생활을 하면서도 박 감독은 줄곧 비주류에 가까웠다. 베트남 축구에서의 대반전이 아니었다면 박 감독은 지금쯤 지도자 생활에서 은퇴하고 잊혀진 인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어 독일을 격침시켰던 신태용 감독 역시 지금은 인도네시아 대표팀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유능한 국내 지도자들이 대표팀에서는 소모품처럼 잠시 이용하다가 버려지기 일쑤다. 또한 협회-언론-팬들이 상대적으로 국내 감독을 더 만만하게 대하고 흔드는 문화는 한국축구의 어두운 고질병 중 하나다.

박 감독은 "미디어는 비난이나 조언을 할 수 있지만, 협회가 일정 부분 감독이 소신을 유지하게끔 방패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당부하며 "이런 측면에서 협회가 제 역할을 했는지도 돌아보고, 국내 감독들도 역량이 있다는 걸 봐줬으면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또한 박 감독은 마이클 뮐러 신임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장 위촉에 대해서도 생각을 밝혔다. 축구협회는 지난 4일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위원장을 선임하며 새 감독을 찾는 중책을 맡겼다. 4년 전 파울루 벤투 감독을 선임했던 김판곤 위원장(현 말레이시아 대표팀 감독)이 맡았던 역할이었고, 전임 이용수 위원장은 좋지 않은 여론 때문에 불명예 사임했다.

박 감독은 "신임 기술위원장님을 뵙지는 못했고 독일 분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 과연 국내 지도자들의 역량을 얼마나 아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라고 고백하며 "서류와 데이터를 본다고 해서 정확한 평가가 가능할까 싶다. 이 선임부터가 외국인 감독을 뽑기 위한 것일까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기술위원장이 외국 분이라는 점에는 예외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뮐러 위원장의 등장 이후 한동안 국내파들이 거론되던 차기 감독 후보군은 외국인 지도자 선임으로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분위기다.

명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박 감독의 이야기는 사실 국내 축구인들이 하기 어려운 지적이나 팬들의 마음을 대변해준 것에 가깝다. 만일 다른 국내 축구인들이 이런 의구심을 거론했다면 대번에 '외국인 기술위원장에 대한 텃세'나 '국내 지도자들끼리의 제식구 감싸기' 정도로 매도당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박 감독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하며 축구협회와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고, 한국에서 지도자나 행정가를 할 생각도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소신발언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박 감독의 지적은 감독 선임과 대표팀 운영에 있어서 그만큼 설득력 있고 투명한 명분과 절차를 제시해야 한다는 조언으로 해석된다.

한국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수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지도자들도 꾸준히 배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명장은 어느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항서 감독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베트남에서 축구인생의 뒤늦은 전성기를 열었다. 베트남에서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겼을 리는 없다. 단지 한국축구에서는 그의 풍부한 경험과 연륜을 제대로 활용할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 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한국축구에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까운 재능과 연륜을 썩히고 있는 '제2의 박항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카타르월드컵에서 아시아팀으로 한국과 나란히 16강에 올랐던 일본은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과 재계약을 맺었다. 모리야스 감독 역시 국내파 감독으로 자국에서는 내내 저평가를 받았지만 일본축구협회는 꾸준한 믿음과 지원을 다했고 결국 모리야스 감독은 월드컵에서 결과로서 증명해냈다.

우리도 언젠가는 히딩크나 벤투같은 외국인 감독 못지않게 당당하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국내 지도자를 배출해내야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 개인의 능력만을 탓할 게 아니라, 그들이 제대로 일하고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게 중요하다는 박항서 감독의 지적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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