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이 미워했던 송시열, 이렇게 보복했다

김종성 2023. 1. 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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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

[김종성 기자]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한 장면.
ⓒ tvN
 
시즌 2로 돌아온 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아래 유세풍 2)는 좌의정 조태학(유성주 분)의 망령에 시달리는 청년 군주(오경주 분)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왕 시해 음모의 주범인 조태학이 이미 죽었는데도 젊은 임금은 그로 인해 불안과 악몽을 겪는다.

<유세풍 2>의 배경인 조선 후기에 왕실의 원한을 샀던 인물 중 하나로 우암 송시열을 들 수 있다. 이 사극이 송시열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후기 왕실의 입장에서는 송시열이 조태학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밉고도 두려운 존재였다.

보수세력인 서인당 지도자인 송시열은 '작은 정부론'에 따라 효종 임금의 '큰 정부론'을 견제했다. 중앙군을 확충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큰 정부를 지향하는 효종의 정책은 지주계급의 반발을 초래했다. 중앙군이 많아지면 증세 정책이 동반되는 것은 물론이고, 장정들이 군인으로 충원돼 사노비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주계급의 이익을 반영해 송시열이 효종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효종은 송시열을 설득하고자 1659년 4월 2일(실록 상의 음력 날짜는 3월 11일)의 독대에서 북벌론까지 거론했다. 만 40세 된 군주는 52세 된 집권당 지도자에게 자신이 중앙군을 확충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하기 위해서니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

송시열은 군심(君心) 100%로 여당 지도자가 된 인물이 아니었다. 민심 30%, 당심 70%로 뽑힌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날의 독대 분위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송시열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서인당 당심 100%로 당수가 됐다. 철저히 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론에 대해 '총론에는 찬성, 각론에는 반대'하는 방법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그런 방식으로 효종의 중앙군 확충 정책을 반대한 것이다.

이 같은 송시열과 서인당의 압박 속에서 효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독대 2개월 보름 뒤인 그해 6월 23일(음력 5월 4일)의 일이다.

효종이 죽은 뒤에도 계속된 송시열의 압박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한 장면.
ⓒ tvN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압박은 효종이 죽은 뒤에도 계속됐다. 효종의 새어머니인 장렬왕후 조씨(자의대비)가 상복을 3년복(참최복)으로 입을지 1년복(기년복)으로 입을지가 쟁점이 된 제1차 예송 논쟁 때도 그랬다.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라면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하고, 장남이 아니라면 1년복만 입으면 됐다. 이 상황에서 송시열은 자의대비가 1년복만 입도록 함으로써 효종의 위상을 깎아내렸다. 효종에 대한 기득권층의 인식을 상복 문제에까지 반영시켰던 것이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이지만 인조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비운의 세자인 소현세자의 동생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소현세자보다 높았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는 왕위계승자인 후사(後嗣)를 지칭하는 사자(嗣子)가 장남인 일남(一男)보다 앞자리에 배치돼 있다. 장남보다 후계자가 더 높게 인식됐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조의 장남이 아니라는 점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임금이 죽었으므로 관례대로 3년복을 입도록 하면 될 일이었는데도, 굳이 그렇게 효종의 위상을 떨어트렸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관련해서도 이상한 모습을 보여다.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독살설이 퍼지는데도 이를 적극 규명하기보다는 문제를 덮는 데 주력했다.

효종의 후계자인 현종은 아버지 사망 전날에 갑자기 치료를 중단한 어의 이기선에게 의혹을 품었다. 사망 전날 이기선은 '진맥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치료에서 손을 뗐다. 이전에도 효종을 진맥했던 인물이 엉뚱한 핑계를 대고 책임을 방기했던 것이다.

음력으로 현종 즉위년 6월 3일자(양력 1659년 7월 21일자) <현종실록>에 따르면, 이기선은 수사기관의 심문을 받을 때도 "원래부터 진맥하는 법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사극에서 자주 묘사되듯이, 어의들은 왕후나 후궁의 손목을 잡지 않고도 맥을 짚곤 했다. 손목에 맨 실만 잡고도 환자의 몸 상태를 확인했을 정도다.

원래부터 진맥법을 몰랐다는 황당한 변명에 현종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맥 짚는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의원이 됐느냐?"며 이기선에게 엄벌을 가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때 이기선을 사지에서 건져낸 사람이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현종의 특명이 있은 지 8일 뒤 창덕궁 양지당에서 현종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기선을 선처해야 할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이기선처럼 그 역시 엉뚱한 논리를 내세웠다. 현종 즉위년 6월 11일자(1659년 7월 29일자) <현종실록>에 따르면, 송시열은 '이기선은 원래부터 맥을 짚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호소했다. 결정적 순간에 치료를 중단한 이기선을 그런 황당한 논리로써 옹호했던 것이다. 이기선을 선처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구명운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은 서인당 지도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기선을 사지로 내몰지 않을 것이며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효종 독살설과 관련된 의혹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묻혀져갔다.

송시열 벌한 숙종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한 장면.
ⓒ tvN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부정적 태도는 왕실이 반감을 갖게 만들었다. 왕실의 반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효종의 손자인 숙종이 왕이 된 뒤에 극명하게 표출됐다.

제19대 주상인 숙종은 1674년에 만 13세 나이로 등극했다. 이 나이에 왕이 되면 어머니나 할머니의 수렴청정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제8대 예종은 만 18세로 즉위한 뒤 1년간 수렴청정을 거쳤고, 고종의 전임자인 제25대 철종은 만 17세에 즉위한 후에 6년간 수렴청정을 거쳤다. 하지만 숙종은 달랐다. 나이는 어리지만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줬던 것이다.

이때 만 67세인 송시열은 어린 숙종을 길들이려 했다. 현종이 죽은 뒤 사흘 뒤에 세자 신분인 숙종이 국정을 총괄하는 임시직인 원상(院相) 직을 제의하자, 송시열은 이를 거부했다. 숙종이 즉위 다음날 사람을 보냈을 때는 송시열이 이미 한양을 떠난 뒤였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정치지도자가 비상시국에 도성을 비웠으니, 당시 관념으로 볼 때는 의도적인 행동으로 비칠 여지가 많았다.

숙종은 현종의 묘지문이라도 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송시열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기선을 잡겠다는 의도를 그렇게 드러냈던 것이다.

숙종이 볼 때, 송시열은 할아버지를 압박한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압박을 받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송시열에 대해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숙종을 상대로 송시열이 위와 이 행동을 했으므로 숙종의 반감이 더 커지는 게 당연했다.

이는 이듬해 양력 2월에 숙종이 송시열에게 인생 최초의 유배형을 안기는 원인이 됐다. 또 15년 뒤인 1689년에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는 원인 중 하나로도 작용했다. 송시열이 82세에 사형을 받은 것은 남인당 출신인 장희빈의 아들(경종)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지만, 송시열에 대한 왕실의 뿌리 깊은 반감과도 무관치 않다.

조태학을 증오하는 <유세풍 2>의 젊은 임금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효종 사망 이후의 조선 왕실은 서인당 지도자 송시열을 싫어했다. 그것이 결국 훗날 숙종의 보복으로 이어진 측면이 농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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