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75>] 보도통제

데스크 2023. 1. 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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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75화 보도통제


한종탁이 세상 다 살아버린 사람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방선희에게 술을 요구했다. 이철백과 임봉식은 귀찮아하는 기색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다.


“취했으면 집에 가지 뭐 하러 여길 와!”


“집에 가면 나 맞아죽는다. 술 좀 주세요, 제수 씨.”


한종탁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술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술 좀 작작 마셔라. 석규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그래서 마신다. 석규한테 미안해서 마신다. 내가 석규한테 해 줄 게 없어서 마신다. 왜, 꼽냐?”


한종탁은 방선희가 부어주는 맥주를 연거푸 두잔 마시더니 좀 더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아무도 듣지 않는 낮술 예찬론을 펼쳤다. 그 사이 방선희는 주방으로 가서 노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낮술은 너무 달아서 치명적이야. 오죽하면 부모도 몰라본다 했을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취했어. 오늘 낮술에 내가 취해버렸어. 낮술은 알코올이 혈액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단축시키지. 햇빛 때문이야. 달빛은 술을 은근히 받아들이라 하지만 햇빛은 거침없거든. 술은 원래 달빛 아래서 마셔야 하는 거야. 햇빛 아래 마시는 건 거역이고 저항이야. 낮술은 반체제행위야. 고로 나는 반체제인사고.”


혼자서 중얼거리던 한종탁이 그대로 탁자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세 사람은 옆 탁자로 자리를 옮겨 잠시 중단했던 술자리를 계속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미옥이 핏기 없는 파리한 얼굴로 블랙&화이트에 도착했다. 방선희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박미옥에게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잔 가득 부어주었다.


“석규 씨가 고생하고 있는 구치소 근처에 방 하나 얻어서 옥바라지라도 해야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명퇴하려고 마음먹은 거예요?”


임봉식이 놀란 얼굴로 묻자 박미옥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철백이 소주잔을 기울이다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미옥 씨. 지금 서울에 간다고 해서 석규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미옥 씨 마음이야 근처에 있으면 미안함이 가실지 몰라도 석규에게 크게 도움 될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남편이 무고하게 옥고를 치르는데 나 몰라라 하는 건 도리가 아니잖아요.”


“미옥 씨가 직장 그만두고 올라와 있는 걸 알면 석규는 더 맘이 안 좋을 거예요. 석규 때문에 직장생활이 힘들다 해도 좀 참아보도록 하세요.”


“그래요. 한 사람이라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야 나중을 도모할 수 있잖아요.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그러세요. 제가 힘이 될 수 있는 한 열심히 계장님을 도울게요. 참고 견뎌 봐요.”

세 사람이 한마음으로 박미옥을 다독였다. 박미옥은 눈물이 그렁해진 시선으로 세 사람을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울에는 제가 한 번씩 올라가 볼게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 아파 마세요.”


“철백 씨도 일해야 하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그건 걱정 마세요. 철백 씨 정도는 제가 먹여 살릴 수 있어요.”


박미옥의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려고 방선희가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치며 아주 호언장담했다. 우스꽝스런 그 모습에 박미옥이 두 뺨에 눈물이 번진 줄도 모른 채 환한 웃음을 지었고 네 사람은 ‘김석규를 위하여!’ 큰 소리로 잔을 높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한종탁은 잠시 후 노지연이 심각한 얼굴로 들이닥칠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코를 골아가며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광대뼈가 툭 불거진, 성깔 있어 보이는 강동욱 검사는 간만에 아주 편안한 자세로 흡연을 즐기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김석규만 생각하면 강동욱은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강동욱에게 있어 김석규는 자신의 출세를 책임져 줄 알라딘의 램프 같은 존재였다. 처음 김석규를 긴급체포하라는 부장검사의 지시를 받았을 때 강동욱은 무척 난감했었다. 정국의 핵으로 부상한 김석규는 뜨거운 감자가 되어있었고 아무리 상관의 지시라지만 함부로 덥석 물다간 왕창 데일 염려가 있었다.


“긴급 체포할 만한 사안이….”


“유언비어 유포야!”


강동욱이 자신 없어 하는 얼굴로 말꼬리를 흐리자 부장검사가 호통 치듯 말했다. 강동욱은 ‘예?“라는 반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부장검사가 유언비어 유포라면 유언비어 유포인 것이고 이미 사전 검토 작업은 끝났다는 말이었다. 강동욱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고 부장검사의 지시에 따랐다.


사실 김석규에 대한 긴급체포를 시도한 것은 여론을 조성하는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는 부담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하루 전날 강주의 버스터미널에서 대형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양상사 아니 주상사가 함께 술 마시던 노숙인들과 시비가 붙자 평소 지니고 다니던 흉기로 다섯 명이나 찔러 죽인 사건이었다. 주상사와의 술판에 끼지 못해 다행히 화를 면한 목격자는 마치 영화를 본 듯 생생하게 현장상황을 증언했다.


정신병원에서 심신을 추스르고 홀연히 터미널로 복귀한 주상사는 오장육부, 그 중에서도 위와 창자가 강해져 돌아왔다. 당연히 술도 정신병원에 가기 전보다 더 많이 마셨고 더 늦게 취했다. 술에 있어서는 천하무적이요 거기에 양아치 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노숙인들 사이에서 일순간 카리스마 주로 통했다. 카리스마 주는 노숙인들에게 훈계조의 사설을 늘어놓기 좋아했고 그럴 때마다 추임새처럼 주먹으로 머리를 쿡쿡 쥐어박았다.


그날도 카리스마 주는 술 마시는 내내 노숙인들의 머리를 콕콕 쥐어박으며 훈계하듯 말했는데 평소 같으면 눈도 함부로 뜨지 못할 노숙인 하나가 술기운을 빌어 독사 대가리처럼 머리를 치켜들고 고까운 심사를 쭉 찢어진 눈에 실어 보내자 나머지 노숙인들도 술에 취해 카리스마 주를 우습게보고 ‘좆도 아닌 게 카리스마?’ 운운하며 아무 생각 없이 동조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카리스마 주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회칼을 휘둘러 세 명은 술자리에서 절명했고 나머지 둘은 터미널 쪽으로 달아나다가 하나는 대우 버스 뒤에서, 또 하나는 현대 버스 뒤에서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정보 계통을 밟아 청와대까지 보고되었는데 그렇잖아도 한창 음주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는 시기에 알코올중독자에 의한 대형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악재가 되고도 남을 일인지라 당국에서는 협조라는 미명 아래 보도통제를 꾀했다. 동시에 김석규에 대한 긴급체포를 감행하여 다음 날 유수의 신문 헤드라인을 그에 대한 기사로 도배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강주 버스터미널의 대형 살인사건은 지역 신문에나 보도되거나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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