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아래 부음정에 가다
[민영인 기자]
월요일, 보통의 직장인들은 가장 싫어하는 요일이다. 오죽했으면 월요병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러나 나에게 있어 월요일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다. 이럴 때 옛날 선비라면 멀리 있는 벗을 찾아 몇 날 며칠 머물며 술과 함께 시문과 정세를 논하였을 것이다. 술과 문장 그리고 혼탁한 정세에 대해 묻고자 길을 나섰다.
▲ 부음정 부음정 편액과 주련 |
ⓒ 민영인 |
부음정(孚飮亭)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이 45세 때인 선조 13년(1580)에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도 역사다. 내암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떠나 나는 그의 효성과 강직함, 의리를 좋아한다.
▲ 부음정기 주역의 64괘인 화수미제괘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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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有孚于飮酒(술을 마시는데 믿음이 있으면), 无咎(허물이 없다)"는 데만 집착해 내암 선생에게 일차원적인 술 마시는 법도를 묻고자 했다. 그 이후의 구절은 "濡其首(그 머리까지 적시게 되면) 有孚失是(믿음이 있어도 옳음을 잃게 된다) 象曰(상에 이르기를) 飮酒濡首(술을 마시는데 머리까지 적시는 것은) 亦不知節也(또한 절제를 모르기 때문이다)"가 이어진다.
하늘에 바라는 것 없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다. 이미 마음으로 성찰하며 일을 해 나가니 스스로 한가롭고 편안한 곳이 마시는 땅이다. 한가롭고 조용한 가운데 스스로 수양하니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며 나물 밥에 물 마시면서도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원하지 않으니 이것은 마시는 맛이다. 옛사람의 책을 읽고 배워 앞 사람의 말을 따라가며 행하고, 찾아오는 친구와 서로 어울려 도와가며 학문과 품성을 닦으니 이것이 마시는 자산이다. 세상에 부끄럼이 없음에 이르니 낮이나 밤이나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마시는 때이다. 산 위의 구름, 물에 뜬 달, 흐리거나 맑음의 변하는 상태가 마시는 안주다. 추운 겨울의 소나무 외로운 대나무 하늘을 나는 솔개, 뛰노는 물고기가 마시는 이웃이다. 이것이 마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누룩으로 빚은 술에 의지하여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비유하는 바는 아니어라.
(원문) 孚飮亭記
取羲經中一爻辭以爲一身自處之地 盖酒而非酒飮而非飮也 無望於天無求於人 營爲旣省心自閑安者飮之地也 閒靜自牧不怨不知飯蔬飮水膏梁不願者飮之味也 讀古人書識前言往行有朋友來相與爲麗澤者飮之資也 至於靑天白日晝夜寒暑飮之時也 山雲水月陰晴變態飮之肴羞也 寒松孤竹飛鳶躍魚飮之隣也 其爲飮也 初非托麴孼逃昏冥之比云云. <來庵自述>
부음정은 이름 때문에 정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정(亭)보다는 재(齋)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마당에 서서 바라보면 기둥에 걸린 주련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春到嫩紅萬里晴(봄이 오니 어린 눈 붉은 빛이 저 멀리서도 선명하고), 夕陽影景千山嵐(석양이 지니 천산의 기운이 그림자처럼 드리우네), 여기서 끝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위쪽에다 2003년 4월에 청람사(晴嵐祠)를 세웠다.
▲ 내암 묘소 내암 정인홍의 묘소, 석물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
ⓒ 민영인 |
기왕 내친 걸음이라 400여 미터 떨어진 곳의 묘소도 찾았다. 인조반정(1623) 후 도성으로 끌려 올라가 8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참수를 당하였다. 시신은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이 수습하여 상각사촌 선영에 매장했다고 한다. 현재의 묘소는 안내판에 의하면 고종 1년(1864년)에 이장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청람사 안내판에는 1924년 이장하였다고 각기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홀로 부음정과 묘소를 둘러보고 나니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선생과 연락이 닿았다. 오전에 불가피한 약속이 있다 하여, 오후에 느긋이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해인사로 올라가 차 한 잔 하며 부음정에서 느낀 소회를 풀었다. 내암과는 달리 나는 누룩으로 빚은 술을 마시는 게 좋다고 하였다.
한 선생도 믿음이 있는 음주는 허물이 없다는 데 맞장구를 치며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부음정 편액 안쪽 면에는 '삼우정(三友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 한 선생에게 물었더니 그도 모른다며 알아보겠다고 한다. 혹시 내암 선생과 우리 두 사람이 삼우가 아닐까요?라고 했다.
천화동인이나 화천대유처럼 아주 좋아 보이는 괘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부음정의 화수미제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未)는 종(終)이나 말(末)의 마침이나 끝남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이라는 의미가 되니 다행이다.
올 한 해 절제하고 조심하면서 마침내 기제(旣濟)가 되기를 바라며, 2023년 새해맞이 기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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