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저정치학]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
정치인 노무현과의 인연, 민주당 선거 좌우
"표리부동한 자세 경계해야" 자성 목소리도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박현주 기자]
편집자주 - 해마다 새해가 되면 정치 지도자 자택은 방문객으로 붐빈다. 계파정치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그곳에 한국정치의 주역들이 모여들었다. 자택이 속한 지역은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돼서 정치의 한 축을 이뤘다. 동교동과 상도동, 봉하마을, 평산마을 그리고 달성군과 논현동 등 전직 대통령 주거지를 중심으로 ‘사저 정치학’을 5회에 걸쳐 진단해본다.“이제 맘 놓고 한마디 하겠다. 야, 기분 좋다.” 2008년 2월 25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고향 마을로 돌아간 최초의 대통령. 마을 사람들을 만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날 홀가분한 기분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정치인 노무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투박하지만 서민적인 언어로 다가왔던 인물. 그는 봉하마을에서 촌부의 삶을 살고자 했다. 손녀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논밭을 누비던 장면은 노 전 대통령이 꿈꿨던 삶을 상징한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산과 들의 바람을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봉하마을에서 느꼈던 행복의 시간은 지속되지 않았다. 전·현직 대통령의 정치적인 충돌, 검찰수사 그리고 서거. 2009년 5월 23일, ‘바보 노무현’은 세상을 떠났다. 장대비가 내리던 5월 24일, 봉하마을을 찾은 추모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2㎞가 넘게 이어진 국화꽃 추모행렬이 그 비를 다 맞으며 조문을 기다렸다.
그때의 슬픔과 분노의 시간은 한국 정치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던 이른바 노무현 정신은 긍정 에너지로 전환돼 정치의 변화를 추동했다. 지난해 5월 대선에서는 주요 후보 모두가 노무현 정신 계승자를 자처했다. 지난 대선을 놓고 ‘노무현 없는 노무현 시대’라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었던 부산 북구·강서구의 현역인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노무현 정신이 유효한 정치환경”이라며 “통합의 정신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시대정신”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이 떠난 이후 봉하마을은 친노(친노무현)의 성지가 됐다. 해마다 5월 23일이 되면 봉하마을에 추모객이 몰려든다. 특히 정치에 뜻이 있는 이들은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사진을 찍어 자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알린다. 민주당 계열 정당의 지도부는 설날과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봉하마을을 찾아 참배하는 게 당연한 일이 돼 버렸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대중의 정서는 선거의 판도까지 바꿔 놓았다.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자기 경력에 쓰는 게 당락을 결정짓는 변수가 됐다. 예를 들어 노무현정부 청와대의 어떤 직위 또는 노무현재단의 어떤 직위를 이력으로 올린 뒤 여론조사 경선에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14년간 민주당 주요 선거는 대부분 친노가 승자가 됐다. 2012년·2017년·2022년 대선 모두 노무현 정신의 대변자를 자처한 인물이 대선 후보가 됐다. 당 대표 선거도, 최고위원 선거도, 국회의원 선거도 친노의 정서를 대변하는 이가 강세를 보였다.
친노로 불렸던 이들, 친노를 자처했던 이들은 그렇게 하나둘 권력자가 됐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 당 대표, 원내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노무현의 우산 아래에서, 봉하마을과의 인연을 토대로 그들은 또 하나의 기득권으로 성장한 셈이다.
이제 봉하마을 사람들은 시험대에 올라 있다. 입으로만 노무현 정신 계승을 외치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스스로 자기의 존재 이유를 갉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정치인 노무현에 관한 대중의 정서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퇴임 이후에도 기득권의 벽과 끊임없이 싸우던 인물이었다. 기득권의 안락함에 빠져들기보다 소수의 정서를 대변하며 변화를 추동했다.
봉하마을과의 인연을 토대로 성장한 이들이 노무현 정신을 실천하는 정치를 해오고 있는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자기가 필요할 때 봉하마을을 찾아 사진 한 장을 찍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참여정부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을 지낸 최인호 민주당 의원(부산 사하구갑)은 “표리부동한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의원은 “표심을 얻기 위해 필요할 때만 노무현 정신을 이야기하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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