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96㎏ 모아 1만2100원…폐지값 폭락에도 수레 못놓는 할머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금리 인상 여파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외 여건에 따른 경기침체가 한국 사회 끝자락에 선 폐지 수거 노인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다. 최근 종이·철 등에 대한 수요 감소로 재고가 쌓이면서 제지·재활용공장→압축상→고물상 순으로 폐지·폐고철 매입 가격을 대폭 낮췄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서울 화곡동의 한 고물상에서도 이런 이유 탓에 폐지를 수거하는 독거노인 정모(80) 할머니와 고물상 주인 사이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정 할머니가 주워 온 검은색 철 막대기를 두고서다. “할머니, 이거 안쪽만 철이에요”라는 고물상 주인의 말에 정 할머니는 “내가 고철만 줍는 사람인데, 안팎으로 다 철이요”라며 맞섰다.
언성이 높아지자 고물상 직원이 중재에 나섰다. 철 막대기의 바깥쪽을 자석에 대보기로 했다. ‘쿵’ 자석에 찰싹 달라붙은 철 막대기를 보며 정 할머니가 “거 보시오”라고 외쳤다. 머쓱한 표정의 고물상 주인이 정 할머니에게 350원을 더 건넸다. “1㎏ 더 쳐서 250원이요. 싸워서 미안하니까 100원 더.”
정 할머니의 싸움에는 이유가 있다. 조금이라도 고철 무게를 더 많이 인정받아야 예년만큼 값을 받을 수 있어서다. 한국환경공단 재활용 가능 자원 가격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기준 폐금속류(철스크랩) 가격은 2021년 12월 1㎏당 439원이었지만, 1년 만에 33.3% 하락해 지난해 12월 293원을 기록했다.
종이 수요 급감으로 폐지 가격도 하락했다. 2021년 12월 1㎏당 153원이었던 폐지(폐골판지) 가격은 전년 대비 44.4% 하락한 85원으로 집계됐다. 환경부 관계자는 “경기침체의 여파로 제지공장의 생산량이 줄어 폐지 재고가 쌓여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면서 유럽 제지공장의 가동률이 줄어 한국 종이의 수출 경쟁력도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정 할머니는 이날 폐지 60㎏, 고철 36㎏을 고물상에 팔았다. 꼬박 사흘간 모은 폐지와 한 달간 모은 고철이었다. 폐지보단 값을 더 쳐 주는 고철은 누군가 훔쳐가지 못하도록 빌라 지하창고에 모아뒀다고 정 할머니는 설명했다. 폐지와 고철을 수레에 쌓으니 정 할머니 키보다 높았다. 그 수레를 끌고 까치산역과 목동사거리 사이 언덕을 오르내리는 동안 동네 이웃 몇 사람이 정 할머니를 도왔다.
정 할머니는 고물을 팔러 가는 길에 이따금 수레를 놓고 멈췄다. 이미 가득 찬 수레지만, 발에 차이는 길거리 폐지들을 모른 체할 수 없어서다. 그는 발견한 폐지를 빌라 주차장 기둥 뒤나 무인택배보관소 등에 몰래 숨겨두고 나왔다. 한창때는 크게 훼손되지 않은 과일박스는 주변 가게에 팔면 개당 400원, 책도 1㎏당 120원에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폐지를 숨기면서 “사람 다니는 길목에 두면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간다. 다 모아도 몇천원 안 되지만, 요즘은 한 장 한 장이 아쉽다”고 말했다. 고물상에서 수레를 비우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주워 올 요량이었지만, 감춰뒀던 박스 3개는 그새 사라졌다. 수레 무게 10㎏까지 더해 총 106㎏을 온몸으로 끌어 이날 손에 쥔 돈은 1만2100원이었다.
지난해 11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발표한 ‘폐지 수집 노인의 현황과 실태’를 보면 정 할머니와 같은 재활용수집 노인의 수는 1만5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폐지 수거 노인의 연간 수입은 2020년 113만5640원으로 한 달 평균 9만4636원을 번 것으로 나타났다. 정 할머니는 노인 기초연금 30만원에 폐지 수거로 번 돈을 보태 생활비로 쓴다고 했다. 2년 전 의사가 수술을 권한 무릎은 1000만원이 넘는 수술비 때문에 일찍이 포기했다.
폐지 수거 노인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서울 25개 구 중 5개 구는 ‘재활용수집인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폐지 가격이 일정 기준 미만으로 떨어지면 그 차액을 보전해주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그러나 정 할머니가 거주 중인 강서구는 해당 조례 조항이 임의규정인 탓에 실제 보전액을 지급하지 않고, 야광조끼·방한모·장갑 등 안전용품만 지원하고 있다. 강서구청 관계자는 “조례상 꼭 현금으로 지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예산 범위 내에서 안전용품을 구입해 1년에 두 차례 지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폐지·폐고철 가격 한파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환경공단 관계자는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제지공장 등도 마찬가지일 테니 한동안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 일에 생계가 걸린 정 할머니는 수레를 놓지 못한다. 36년 전 남편과 이혼하며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 지금도 아들이 건네는 용돈을 한사코 거부한다는 정 할머니는 “폐지 수거 일을 하는 건 부끄럽지 않지만, 폐지 수거 일을 한다는 사실이 혹여 자식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찬규 기자 lee.cha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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