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내가 집주인이 될 상인가
‘빌라왕’ 전세사기 뉴스의 피해자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게도 올 수 있던 불운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것 같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피해자들 소식을 살폈다. 무려 1139채의 빌라와 오피스텔을 무자본 갭 투자로 매입한 김모씨가 지난해 갑자기 사망한 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뉴스를 보다가 귀를 의심했다. 1139채라니. 타인 명의로 얼마든지 계약이 가능한 우리나라 부동산 매매 과정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건축주와 분양대행사 그리고 부동산 중개업자가 이름만 빌려줄 바지사장을 찾아 그 전세금을 서로 나눠 갖는 구조다. 그러니 누구나 쉽게 전세사기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가 바지사장인지 실제 집주인인지 구분할 방법이 쉽지 않은 게 문제다. ‘집주인이 될 상’까지 알아봐야 하나. 관상 보는 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보다.
내 사정은 이렇다. 2년 전 가을쯤 이사를 하게 됐는데, 마침 분양받았던 시흥 아파트 입주 시기가 맞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요량이었다. 신축 아파트의 편리한 시스템을 보고 마음이 혹했지만 일산까지 출퇴근이 영 마음에 걸렸다. 그 막히는 길을 뚫고 운전을 하려니 손실되는 체력과 시간이 아깝기만 했다. 그러다 생각이 도달한 곳은 창릉 신도시였다. ‘고양시 거주자 우선’이라는 조건을 보니 주소지를 옮겨서 자격을 잃는 게 아까웠다. 이사 날짜를 2주 앞두고 급히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부동산 사장이 마침 괜찮은 신축 빌라가 있다고 데려간 곳은 창릉 신도시 부지 빌라촌이었다. 신도시 개발이 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전단지들이 거리에 마구잡이로 뿌려져 있었다. 산을 앞두고 있는 거실 전망이 좋고 볕이 잘 드는 조용한 집이었다. 2주 후에는 살고 있는 집의 짐을 빼야 하니 마음도 급했다. 바로 계약금을 입금했고, 이사를 했고, 계약서를 쓰러 부동산에 갔다. 부동산에는 4층짜리 빌라 건물의 주인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분양을 받았다는 ‘집주인이 될’ 사람이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집주인이 될 50대 아주머니를 보니 불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푸석하게 잿빛으로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온통 흐트러져 있고, 오래 입어 소매끝이 닳은 얇은 패딩 안에 계절에 맞지 않는 여름 나일론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차라리 그 어울리지 않은 스카프를 하지 말지. 사람의 겉모습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려는 이런 내 시선을 스스로 의식하며 자책하고 있는데, 아주머니의 불안하게 떨리는 손을 보고 말았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빌라 건물 주인이 갑자기 나를 보며 큰소리로 입을 뗀다. “집주인이 살거니 걱정말아요. 그쵸 아주머니?” 한참의 정적 후에 집주인 아주머니가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네….”
부동산 사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법무사가 나타나 계약서와 등본 확인을 해준다. 점점 생각은 뭉게뭉게 커져간다. 모두가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나. 계약서를 쓰고 나오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전세보증보험 얼른 들어놔라.” 사는 동안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이사를 가기 석 달 전에 서둘러서 집주인에게 문자를 했다. 이사 통지를 하고 반드시 집주인의 답을 문자로 남겨둬야 한다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전세보증금 요청을 할 수 있지만 제발 다음 세입자가 들어와서 그 보증금으로 자연스럽게 이사를 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유례없는 부동산 경기 위축 상황 속에서 다행히 세입자를 찾았고, 통장에 입금된 계약금을 볼 때쯤 희대의 빌라왕 전세사기 뉴스가 터졌다. 얼마 뒤 화곡동 빌라왕이 또 등장했다. 지금도 나는 모른다. 내가 만난 아주머니가 ‘진짜’ 집주인이었는지. 그래도 만약 다른 세입자가 없었으면 난 HUG에서 전세보증금을 받기 위해 지루한 과정을 겪고 있었을 것 같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우리나라 전세제도는 이렇게 괴물이 돼가고 있다. 심지에 불이 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돌리는 모양새다. 안 터지니 살아있었다.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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