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어느 자영업자의 초상
지난 3일 밤 서울에서 택시를 탔다. 강남역 등 주요 상권을 돌며 자영업자들에게 요즘 경기가 어떤지 묻고 다니던 길이었다. 택시 운전사 장모(43)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작년 상반기까지 가로수길에 있던 호프집 사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거기(가로수길) 한 20년 있었죠. 사진작가로 시작했거든요. 옷 가게도 열어봤고. 근데 사람들이 요새는 옷을 온라인에서 사잖아요. 그래서 호프집으로 바꿨는데 결국 접었어요.”
코로나19 기간에도 버티던 그를 끝내 포기하게 한 건 임대료 인상이었다. “임대인이 갑자기 매월 150만원을 더 내라고 하더군요. 250만원씩 내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끝나 오가는 사람이 늘었으니 임대료를 올려야겠다는 겁니다. 어찌 버티란 말인지….”
가게를 정리한 그는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기사 교육받으러 갔더니 나처럼 새로 시작한 사람이 많았어요. 대학 교수하다 퇴직한 분도 있고, 20, 30대도 왔어요.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서겠죠.” 택시 일은 생각보단 돈이 안 벌리지만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다른 일 하기도 어려워서다.
그에게 지난 11월 서울시가 가로수길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인한 원주민 유출 현상)을 막기 위해 대규모 개발을 제한하고 임대료 인상을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대책을 내놨다고 전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요?”
이후 가로수길을 찾았다. 곳곳 빈 상가에 걸린 ‘임대’ 안내 문구가 스산했다. 다른 곳 자영업자들 사연도 들었다. 수입이 급격히 줄어 6년간 일군 커피숍을 팔려고 내놨는데 5개월째 살 사람을 못 찾았다는 안모(58)씨, 옷·잡화 가게를 21년째 하는데 최근 2년간 집에 생활비를 못 갖다 줬다는 송모(52)씨 등. 이들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피부 미용 일을 12년째 해온 이모(39)씨는 6개월 전부터 투잡을 뛰고 있다고 했다. 업체 블로그 글을 써주는 일로, 하루 6~7시간 써서 월 40만원을 받지만 밤에 아이 재우고 할 수 있는 일 중에선 종이팩 접기나 인형 눈 꿰매기보다 낫다고 했다. “코로나19 때 받았던 대출 원금 상환 기간이 곧 돌아오는데, 요즘 사람들이 돈을 안 써서 본업에선 수익이 안 나요. 코로나 심했을 때보다 더 힘들어요.”
정부가 일부 소상공인을 위해 내놓은 저금리 대출 등도 고금리·고물가 직격탄을 맞은 563만 자영업자들에겐 턱없이 부족한 듯했다. 뒤늦게 “이제 와서요?”라고 한탄하는 이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도움이 될 만한 정책이 발 빠르게 더 나오길 바라는 건 무리일까. ‘경제 실핏줄’ 자영업자들의 신음을 귓등으로 흘리기엔 경고음이 크다.
백일현 산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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