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꺾일 수 있다는 마음
“전두환 시대였다면 네가 나 건드리면 가지 바로 지하실.” 유력 정치인을 아버지로 둔 래퍼가 최근 다른 래퍼를 저격하며 이런 가사를 써 논란이 됐다. 그는 앞서 ‘하루 이틀 삼일 사흘’이란 가사를 써 일부 기사에서 젊은층 문해력 부족을 지적하는 사례로 인용됐다. 그는 자신의 문해력을 지적한 기사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며 이런 내용을 썼다. ‘김만배와 금전 거래한 마당에 삼일이건 사흘이건 당신들이 기사 쓸 자격이 있을까?’
언론의 자격을 묻고 기자를 ‘기레기’란 멸칭으로 부르는 이들의 존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 상당수는 지지하는 진영에 대한 비판 기사를 두고 언론의 자격을 묻는다. 이때 묻는 언론의 자격은 기자로서 그리 뼈아프지 않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을 이 래퍼의 조롱이 착잡하게 다가온 건 왜일까. 이전에는 반박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면, 이번에는 반박할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수사기관이 의율하지 않았다거나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말을 떠올렸지만 공허하고 이율배반적이다. 언론은 죄가 되지 않아도 공인들의 윤리적 문제, 이해충돌을 지적한다. 재판 전 수사단계에서 취재한 의미 있는 사실은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기에 보도가치가 있다. 불미스러운 일로 쓸쓸히 퇴장한 선배 언론인들은 그런 가르침을 준 이들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데 이 얘기만 나오면 왜 마음이 꺾이는지 모르겠다. 믿고 따르던 선배에 대한 야속함, 낭패감 등이 뒤섞인다. 감정의 농도는 달라도 모든 기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취재원이 관련 얘길 꺼내면 그저 안타깝다고 실없이 웃는다. 언론사들의 사과 이후 분위기는 어떤 면에서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악당 볼드모트 언급을 꺼리는 것과 닮았다. 책·영화 속 세계는 볼드모트를 호명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렇다고 볼드모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얘기해야 잊지 않고, 대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오너일가의 지시는 절대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우 결코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말 종영한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직장인들 사이 화제가 된 재벌가 비서 윤현우의 대사다. 기자는 비서와 다르게 매일 수 없이 질문하고, 판단해야 한다. 때론 지시를 두고 선배와 토론과 설득의 과정도 거친다. 이젠 질문과 판단은 밖이 아니라 때론 안을, 자신을 겨눠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꺾일 수도 있다는 마음과 태도 같다. 자칫하면 나도 고의건 실수건 꺾여버릴 수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 자신에게 더 예리하게 질문하고, 엄격하게 판단하려 애써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언론이 더는 꺾이지 않는 방법일 테니.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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