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호치민에 가려거든 이거 먼저 보세요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저는 달랏을 뒤로 하고 슬리핑버스에 타고 한참을 달려 호치민 시에 도착했습니다. 교통체증 한가운데에 걸린 버스는 달랏에서 출발한 뒤 열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호치민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벌써 해가 진 지 한참이었지만, 도시의 열기는 꺼질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호치민 시의 원래 이름은 사이공입니다. 한때 남베트남의 수도였고, 베트남이 통일된 지금에 와서도 베트남 최대의 도시죠. 베트남의 수도는 북부의 하노이고 인구 수도 하노이와 호치민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각 지역의 총 생산(GRP)을 비교하면 차이가 꽤 뚜렷합니다.
2019년 베트남 통계청의 자료를 보니, 하노이의 GRP는 420억 달러 수준, 호치민 시의 GRP는 617억 달러 수준입니다. 꼭 이런 수치를 보지 않더라도, 고층 빌딩이 늘어선 호치민 시의 도시경관은 하노이와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 호치민 시의 야경 |
ⓒ Widerstand |
심지어 지금의 호치민 시 지역은 이 참파 왕조의 땅도 아니었습니다. 참파 왕조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지만, 역사상의 대부분의 기간은 크메르(캄보디아)가 지배하던 땅이었죠. 이 지역에 베트남인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참파가 베트남의 속국이 되고 크메르 역시 약화되었던 17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 호치민시 박물관이 된 코친차이나 총독 관저. |
ⓒ Widerstand |
사이공에서도 전투는 쉽지 않았지만, 결국 프랑스는 사이공을 완전히 차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1862년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며 사이공을 포함한 베트남 남부 3개 주가 프랑스에게 할양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이 곳을 '코친차이나'로 부르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 사이공이 메콩 강의 하류와 접해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인도차이나 곳곳과 무역을 하고, 더 상류로 올라가면 중국 내륙에도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죠.
프랑스는 사이공을 할양받은 뒤 곧바로 거대한 도시계획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근대적 항구가 만들어졌고, 도로가 정비되었습니다. 강 하구라는 특성상 진흙으로 가득했던 도시는 간척과 매립을 거치며 평탄한 구획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성당이 만들어졌고, 우체국이 세워졌고, 호텔과 오페라 하우스가 만들어졌습니다.
▲ 독립궁이 된 남베트남 대통령궁 |
ⓒ Widerstand |
곧 사이공은 해양 도시의 무역 네트워크 한 가운데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주일에 한 번 마르세유를 출발해 콜카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사이공, 마닐라, 중국, 고베, 요코하마를 잇는 정기 여객선을 띄울 정도였습니다. 사이공에서 냐짱, 꾸이년, 다낭, 하이퐁을 잇는 연안 여객선도 출항하며 베트남 곳곳의 무역망이 사이공으로 수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도시는 베트남을 넘어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기능을 한동안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메콩 강 상류의 폭이 좁고 유속이 급해 무역선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대신 프랑스는 메콩 강에서 북부의 흐엉 강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군대를 파병해 하노이를 점령했죠. 이렇게 베트남은 셋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북부 통킹 지역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습니다. 중부 안남 지역은 응우옌 왕조가 지속되지만 사실상 프랑스가 모든 행정을 대행하는 보호국이 되었죠.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은 완전히 프랑스가 지배하는 프랑스령이 되었습니다.
한때 청나라가 여기에 불만을 품고 청불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셋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식민 상태는 1945년 2차대전 막바지까지 이어집니다. 중부에는 명목상으로 응우옌 왕조가 존속했지만, 결국 베트남은 이렇게 독립을 상실한 셈이지요.
프랑스가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를 하노이로 옮긴 뒤에도 사이공은 경제적 성장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팽창하고 확장된 도시는 2차대전 이후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죠. 그리고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1975년에 호치민 주석의 이름을 따 '호치민 시'가 되었습니다.
▲ 호치민 시청 앞의 호치민 동상 |
ⓒ 김찬호 |
하지만 이 '호치민 시'에는 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이 거주하다가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쓰였던 건물은 이제 '독립궁'이라는 이름을 달고 넓은 공원이 되었습니다. 코친차이나의 총독이 거주하던 건물은 호치민 시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 동커이 거리와 레러이 거리 |
ⓒ Widerstand |
'호치민 시'의 시청 앞에서 '응우옌 후에 거리'를 보고 있는 호치민의 동상을 보았습니다. 호치민 시의 가장 화려한 중심가를 이루고 있는 '동커이 거리'와 '레 러이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바뀐 것이 꼭 이름 뿐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때는 베트남 사람들은 들어갈 수조차 없었던 도심이었습니다. 그 시절 만큼이나, 오늘 이 도시의 밤도 북적이고 있습니다. 놀랍도록 그대로이지만, 또 놀랍도록 많은 것이 그 안에서 바뀌고 있습니다. '사이공 시'가 아닌 '호치민 시'가 된 이 도시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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