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국민은 국민 아닌가"…아프간 피랍 담은 '140억 대작'
한국 여성 감독 최초로 제작비 100억원 이상의 대작을 코로나19 한복판에, 그것도 머나먼 중동에서 찍었다. “힘들었다”고 꼽을 요인이 수십 개는 될 법한 영화를 내놓았지만, 임순례 감독은 “영화 찍으면서 고생 안 하는 팀이 어디 있겠느냐”는 호쾌한 말로 입을 뗐다. 5년 만에 완성한 신작 ‘교섭’ 개봉을 앞두고 16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자리에서다.
18일 개봉하는 ‘교섭’은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피랍됐던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43일 동안 이어진 피 말리는 피랍 사태를 인질들 시점이 아닌, 교섭 작전에 투입됐던 가상의 인물들, 외교관 재호(황정민)와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아프간·탈레반, 韓 영화서 그려진 적 없던 요소”
사건 발생 당시,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프간으로 출국한 인질들을 향해 국민적 비판이 쏟아지는 등 무수한 논란을 낳았기에 임 감독도 영화화에 부담을 느낀 게 사실이다. “어떻게 만들어도 논쟁적일 것 같아서” 처음엔 거절했지만, 시나리오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논쟁이 됐던 지점을 떠나 생각해보면, 아프간이라는 나라, 탈레반이라는 집단을 시각화해 그간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던 새로운 요소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사건 속에 여러 복잡한 믿음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임 감독은 “한 집단은 기독교적 신념에 의해 (아프간에) 선교를 하러 간 것이고, 탈레반이라는 또 다른 집단도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그들을 억류한 것”이라며 “결국 신념과 신념이 부딪히는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더 나아가 “국가가 국민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지는 것이 맞는가, 잘못을 한 국민은 국민이 아닌가 등 여러 묵직한 주제를 큰 테두리에서 던져볼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고 연출 계기를 설명했다.
“전형적 액션, 상업적 극화 피하려 했다”
피랍 사태라는 극적인 실화가 소재인 만큼 상업영화 특유의 액션이나 신파 요소가 극을 지배할 것 같지만, 영화는 이런 뻔히 예상되는 연출들을 영리하게 비껴간다. 액션은 꼭 필요한 시점에 짧고 굵게 등장하고, 인질들의 눈물 대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공직자들의 치열한 논쟁과 심리 묘사에 훨씬 공을 들인다.
임 감독은 “다양한 액션이 들어가긴 했지만, 무조건 추격하고 이유 없이 죽이는 식의 전형적인 액션과는 다른, 새로운 액션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액션을 구상할 때부터 많은 고민을 했고, 그런 부분이 영화에서 잘 구현됐다”고 자평했다. 인질들 분량을 최소화한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선교단에 초점을 맞추면, 불필요한 논쟁에 휩쓸려서 영화가 얘기하려는 본질이 가려질 거라 생각했다”며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극화하지 않도록 균형점을 찾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사건 자체는 실화이지만, 교섭 과정의 구체적 내용은 대외비에 부쳐져 있는 터라 상당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 임 감독은 “실제 교섭에 참여했던 분은 당연히 만날 수 없었다”며 “협상 과정에 등장하는 ‘지르가’(아프간 전통의 원로 부족회의)나 브로커와의 에피소드 등은 당시 돌았던 소문이나 실제 이슬람 문화를 참고해 현실과 픽션을 섞어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늘과 땅 사이 나밖에 없는 느낌”이라는 극 중 대식의 말대로 가슴이 뻥 뚫리는 듯 광활한 풍광은 애당초 입국이 불가한 아프가니스탄(2007년 8월 7일 이후 현재까지 여행금지국가로 지정) 대신 비슷한 풍경을 지닌 요르단에서 촬영했다. 2020년 여름, 팬데믹이 세계를 휩쓸던 당시 요르단 입국 허가도 겨우 받아냈지만, 촬영 시 진짜 복병은 더위였다. 임 감독은 “7월부터 9월까지, 여름 한 가운데서 찍느라 무더위를 견뎌내야 했다”며 “아랍어를 쓰는 요르단 배우들이 아프간의 두 가지 공용어(파슈토어·다리어)를 따로 배워서 연기해야 하는 점까지, 아주 난리였다”고 웃으며 돌이켰다.
여성 감독 첫 대작, “전작의 10배 예산”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교섭’은 임 감독의 첫 블록버스터인 동시에 한국 여성 감독이 만든 최초의 제작비 100억 이상 영화이기도 하다. “전작인 ‘리틀 포레스트’의 거의 10배 정도의 예산이 들어갔다”며 부담감을 털어놓은 그는 ‘여성 감독으로서 첫 대작을 만든 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지인 찬스를 쓰겠다”며 동행한 제작사(영화사 수박) 대표에게 답을 넘겼다.
“감독님과 ‘제보자’와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들 모두 색깔이 다르잖아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잘 만드신다는 점에서 ‘교섭’도 전형적인 액션물이 아닌 감독님만의 색깔로 만들어주실 거라 생각했어요.” 신범수 영화사 수박 대표의 말에는 여성 감독도 순제작비 140억원의 대작을 충분히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신 대표의 말대로 여러 장르와 소재를 오가며 영화를 만들어온 임 감독은 “인간, 그중에서도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 항상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교섭’도 결국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난관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구하려는, 인간애를 바라보는 이야기”라면서다.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이야기, 그런 연대와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항상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교섭’은 이런 제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상업적인 요소를 차용한 영화인 것 같아요. 전형적이지 않아도 관객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저로서는 가장 기쁜 결과일 것 같습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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