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웅변가' 마틴 루터 킹의 반전...대학때 연설 학점 C였다

김선미 2023. 1. 1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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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생일을 기념해 매년 1월 셋째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로 정하고 그를 추모한다. 사진 마틴 루터 킹 기념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권운동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목사 고(故) 마틴 루터 킹의 탄생일을 맞아 미국 전역이 추모 열기에 휩싸였다. 미국은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로 지정하는데, 올해는 16일(현지시간)이다. 이날을 기념해 학교와 관공서는 모두 닫았고 뉴욕 증시도 휴장했다. 이날 워싱턴포스트(WP)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마틴 루터 킹의 삶과 유산을 조명했다.


①본명은 ‘마틴’ 아닌 ‘마이클’


아버지(마틴 루터 킹 시니어·뒷 줄 가운데)의 개명으로 아들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아랫줄 오른쪽)도 새 이름을 갖게 됐다. 사진 타임지 캡처

WP에 따르면, 1929년 출생 당시 그의 이름은 마이클 킹 주니어였다. 역시 목사였던 아버지 마이클 킹 시니어의 이름을 따랐다. 하지만 34년, 독일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큰 영감을 받아 개명하면서 그의 이름도 바뀌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교회 개혁 논제 95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못 박고 종교 개혁을 이끈 인물이다. 킹은 28세가 되던 해 출생신고서의 이름을 바꾸면서 공식적으로 새 이름을 갖게 됐다.

②조기 입학한 신동


부커 T. 워싱턴고에 다녔던 킹은 성적이 뛰어나 2년여 일찍 졸업했다. 15세에 모어 하우스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다녔던 역사적인 흑인 남학교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모어 하우스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종에 관한 솔직한 토론을 했다”고 회고했다. 19세가 되던 해 그는 대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로 임명됐고, 이후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③연설 과목 성적은 ‘C’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성적표. 대중 연설 과목에서 'C'를 받았다. 사진 사라 루이스 트위터
그는 현재까지도 위대한 웅변가로 일컬어지지만, 처음부터 연설에 소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작가이자 하버드대 부교수인 사라 루이스가 자신의 트위터에 공개한 킹의 신학교 성적표에는, 그가 ‘대중 연설(public speech)’ 과목에서 ‘C+’를 받았다고 기록돼있다. 루이스는 “C+에 이어 다음 학기엔 C를 받았다”며 “여러분도 꿈을 따라 살라”고 말했다.

④“I have a dream”은 즉흥 멘트


1963년 'I have a dream'으로 알려진 연설을 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사진 AP 유튜브 캡처

63년 8월 28일, 킹이 워싱턴DC 링컨기념관에서 했던 연설 ‘I have a dream’은 오늘날도 명연설로 꼽힌다. 하지만 그가 성경과 미 독립선언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 등을 토대로 작성했던 연설문 초안엔 이런 내용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유명 복음성가 가수였던 마할리아 잭슨이 “마틴, 그들에게 꿈에 대해 말해줘”라고 외쳤고, 킹은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18분간 외쳤다. 두 사람은 자주 찬송과 설교를 함께 해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⑤줄리아 로버츠와의 인연

할리우드 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지난해 9월, 게일 킹과의 TV 인터뷰 쇼에서 “출생 당시 부모님이 병원비를 낼 형편이 못됐는데, 킹의 가족이 내줬다”고 밝혔다. 당시 로버츠의 부모는 애틀랜타에서 배우·작가를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고 한다. 킹의 부인인 코레타 스콧 킹이 인종 차별로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고 호소하자, 로버츠의 어머니가 흔쾌히 수락하면서 두 가족의 인연이 시작됐다. 로버츠는 “이후 친구가 됐고, 킹의 가족이 우리 가족을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줬다”고 말했다.


⑥노벨 평화상 말고 그래미상도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71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상을 받은 적 있다. 사진 그래미 어워드 홈페이지 캡처

킹은 사후인 71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내가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이유(Why I Oppose the War in Vietnam)’로 최우수 연설 기록상을 받았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 뉴욕에서 전쟁을 비판하며 했던 연설이다. 앞서 64년엔 ‘우리는 극복할 것입니다(We Shall Overcome)’으로, 69년에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으로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그는 6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⑦10년 전에도 암살 시도당해


킹은 68년 흑인 환경미화원 파업 운동을 지지하러 멤피스를 찾았다가, 백인 우월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전인 58년에도 암살 시도가 있었다. 킹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에 대한 회고록에 서명하고 있었는데, 한 흑인 여성이 다가와 칼을 가슴에 꽂았다. 킹은 위중한 상태까지 갔지만, 대수술 끝에 목숨을 겨우 건졌다. 훗날 여성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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