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판 즈베던 “클래식 음악 미래에 아시아 역할 중요”
호랑이 이미지와 달리 “한 명의 단원도 해고한 적 없어”
오케스트라 단원은 사회적 존재, ‘서로 듣는 귀’ 중요
렘브란트도, 고흐도 표현하는 카멜레온 악단 돼야
“줄리아드 재학시절 만난 강효(당시 도로시 딜레이의 보조 교수) 교수님을 오랫동안 존경해왔습니다. 지휘대에서도 가르침을 잊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한국인 단원들을 많이 봤고 클래식 음악의 미래에 아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맡은 홍콩 필 뿐 아니라 뉴욕 필에도 한국인이 많습니다. 한국 오케스트라를 맡는 건 고향에 가는 기분입니다.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죠.”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 차기 음악감독 야프 판 즈베던이 17일 광화문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현재 뉴욕 필과 홍콩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인 판 즈베던은 내년 1월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 5년 임기를 시작한다. 원래 7월 첫 공연이 예정됐었지만 1월 낙상으로 오지 못한 오스모 벤스케 전 음악감독을 대신하기 위해 지난 9일 내한해 바쁜 한 주를 보냈다. 10일과 11일 리허설을 진행하고 12일 서울시청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으로부터 음악감독 임명장을 수여받았다. 12일과 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정기공연을 지휘했다. “1주일 동안 서울시향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행복했다”는 판 즈베던은 “단원들, 이사회, 시장님의 환대에 감사하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판 즈베던은 카리스마형 지휘자로 유명하다. 높은 수준을 지향하는 엄격한 리허설로도 정평이 나 있다. 판 즈베던이 음악감독 하마평에 오를 때부터 ‘호랑이 선생님’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이에 대해 판 즈베던은 “무대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잘돼 있어야 한다. 7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들었던 얘기다.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무대에서 100%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110%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항간에 알려진 ‘독재자’ 이미지를 의식한 듯 그는 “38세에 지휘를 시작해서 62세가 됐는데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단원도 해고하지 않았다”면서 “모두가 지금보다 더 나은 연주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연습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음악에 헌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차기 음악감독과 처음 만난 단원들은 리허설 전에는 긴장했지만 공연 뒤 무대 뒤의 분위기가 좋았다는 후문이다. 동석한 손은경 서울시향 대표이사는 “공연 뒤 단원들이 ‘감사하다’ ‘행복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제 여섯 그룹으로 나눠서 차기 음악감독과 미팅을 가지며 소통에도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판 즈베던은 오는 4월부터 8년 만에 이뤄지는 서울시향 단원 채용 오디션을 이끈다. 오디션의 기준으로는 “현재 단원들의 수준에 맞는 실력과 재능.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인 판 즈베던은 19세 때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최연소 악장으로 임용돼 17년간 활동했다. 그는 신입 악장으로 연주할 때 음악감독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솔로이스트처럼 너무 크게 연주하지 말라.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녹아들라”고 했던 충고를 예로 들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사회적인 존재이며 열린 마음과 다른 단원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시절 저는 숄티·줄리니·번스타인·아르농쿠르 등 콘세르트허바우를 찾은 지휘 거장들로부터 무료로 레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악장으로 연주할 때와 지휘대에 섰을 때는 전혀 다른 세계”라며 뮌헨 스테이트 댄스 컴퍼니의 네덜란드 지휘자 안드레이 프레서(Andre Presser)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휘자는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연주가 이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각 단원을 볼 수 있는 눈이죠. ‘내가 다 보고 있다’는 걸 그들이 알 수 있어야죠. 인간관계가 중요해요. 악기 이전에 사람이고 사람 이전에 가족입니다. 두루 살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판 즈베던은 2024년 프로그램에 대해 모차르트, 바그너, 브루크너 등 다양한 작곡가들의 음악에 동시대 음악을 연주할 거라는 청사진을 밝혔다. “바그너의 음악 세계는 특별하다. 임기 중 ‘니벨룽의 반지’,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을 먼저 연주하고 이후에는 ‘로엔그린’, ‘파르지팔’ 등도 무대에 올리고 싶다”며 “두 번째 시즌부터는 30% 정도를 동시대 음악으로 꾸밀 계획이다. 서울시향이 한국을 대표하는 홍보대사이기 때문에 한국 작곡가들에게 위촉하겠다. 특히 ‘오징어 게임’ OST 작곡가 정재일과는 꼭 작업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판 즈베던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주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폐증 아이들의 가족을 지원하는 파파게노 재단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친구인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도 함께하는 이 재단에서는 자폐 아동을 위한 공간을 운영하고 38명의 음악치료사가 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자폐 아동에 맞춰 시선을 낮추는 게 중요하다”는 그는 장애 가족들을 위한 시민 음악회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서울시향이 지니게 될 색채에 관해서는 “우리는 카멜레온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렘브란트처럼 때로는 반 고흐처럼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가리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다.
“오스모 벤스케 전 감독님이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땅에 씨앗을 심는 시간입니다. 꽃이 피더라도 충분히 기다려줘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천국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시향과 함께할 여정이 저는 무척 기대됩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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