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9시간 일하고 건강 지킬 수 있나... ILO의 경고 [소셜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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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원]
국제노동기구(ILO)는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기본원칙을 선언한다.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나 상업적 거래의 품목이 아니라는 원칙이 언제 어디서나 존중해야 할 국제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 자명한 명제는 21세기 ILO의 존엄한 노동(decent work) 의제의 핵심 기반을 이룬다.
이는 노동시간 의제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ILO의 <미래를 위한 존엄한 노동시간 보장>(2018) 보고서는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가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의 원칙을 지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본다. 노동시간의 길이와 편성은 노동의 질뿐만 아니라 작업장 밖 노동자의 삶의 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을 이윤 추구의 수단이자 상품으로 보면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노동시간 체제가 생산성 강화를 명목으로 유지되는 것이 당연시된다.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다치거나 병들고 죽더라도 장시간 노동, 심야 노동, 12시간 주야 맞교대, 24시간 격일제, 불규칙한 교대제가 만연하게 된다.
ILO는 이와 같은 관점에 맞서 존엄한 노동의 원칙이 노동시간 정책에서도 일관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섯 가지 핵심 기준을 제시한다.
주 69시간 노동 가능하게 돼
첫째, 장시간 노동과 반사회적 노동시간이 개별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사회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노동시간은 가족친화적이어야 한다. 노동시간은 여성과 남성 모두 부모로서 하루 단위로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유동적인 시장 수요에 따라 예측불가능한 노동시간 편성이 이뤄지거나, 저녁 시간이나 심야, 주말의 비전형적 근무시간이 불규칙적으로 자주 발생하게 되면 일-가정 갈등이 깊어질 수 있다.
셋째, 노동시간 정책은 성평등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여성과 남성 모두 일과 돌봄 및 평생학습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문화는 일과 돌봄의 양립을 불가능하게 하여 여성들에게 제약을 가하고 유리천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넷째, 노동시간 정책은 생산성을 증대해야 한다. 일-생활 균형을 촉진하는 정책은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ILO 조사 결과, 노동시간 단축은 생산성 증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며 결근율, 이직률 저하를 통해 기업에 이점을 제공한다.
▲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
ⓒ 찰리 채플린 |
ILO에서는 각국 정부가 노동시간 규제를 통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기준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과도한 연장근로와 장시간 노동을 타파하는 것이 핵심이다. 공업부문 사업장에서 근로시간을 1일 8시간, 1주 48시간으로 제한한 1919년 ILO 협약 제1호가 바탕이 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정부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의 권고안에 기초해서 현재 주 단위로 관리하는 연장근로시간을 월 단위 총량관리제로 변경하여 특정 주 연장근로가 12시간을 넘기더라도 허용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새 노동시간 정책이 ILO의 존엄한 노동시간의 원칙과 5가지 기준을 모두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의 주 1일 휴일 보장, 근로시간 4시간당 30분 휴게시간 규정을 적용하면 1주 최대 69시간 근무가 원칙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일감이 몰리는 특정 주에 60시간을 초과하여 연장근무를 하고 나머지 주에 주당 40시간 근무한다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킬 수 있을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3주에 걸쳐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시간이 지속되면 노동자의 건강을 과연 보호할 수 있을까.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SPC 계열사 SPL 노동자의 사망사건의 배경에는 장시간 노동이 존재한다. SPL에서는 주 52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위해 지난해 42일간 특별연장근로를 시행했다.(10월 20일 기준)
IT업계에서도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강도 높은 야근과 철야 근무를 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가 노동자 건강권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계속 제기돼왔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공식집계만으로도 2021년 과로로 사망한 노동자의 숫자는 828명에 달한다. 존엄한 노동시간과의 거리는 아득하다.
수요 변동에 따라 몰아서 일해야 할 때 더 일하고 쉴 수 있을 때 더 쉬는 정책이 기업과 노동자 모두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려면 노동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충전, 휴식의 시간 및 사회적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특정 주 연장 근로시간을 더 늘린다고 하더라도 그 상한을 엄격히 정하고 일일 최대 노동시간 규제를 통해 노동자의 최저 건강권과 휴식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는 11시간 연속 휴식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 지난해 10월 21일 평택역에서 spc 파리바게뜨 평택공장 산재사망노동자를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
ⓒ 공공운수노조 |
이러한 이유에서 ILO는 집중근무제를 운영하는 경우 일일 최대 노동시간을 정하여 노동자 건강과 안전, 일-생활 균형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 단위를 넘어서서 연장근로를 관리하는 다수의 국가도 일일 최대 노동시간을 규제하거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48시간을 넘지 않도록 관리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연속 12주를 기준으로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44시간을 초과할 수 없도록 했고, 독일은 일일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설정하고 하루에 2시간 이상 초과해 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족친화적 노동시간, 성평등, 생산성이라는 존엄한 노동시간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ILO는 가족생활, 돌봄과 육아에는 매일 일정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요구되기에 이와 같은 기준에서 일일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주 52시간을 초과해 몰아서 일하는 시간이 허용된다면 돌봄과 육아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여 노동자의 일-가정 갈등이 증대할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의 직무만족도를 떨어뜨려 궁극적으로 생산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성별 분업이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유연한' 연장근로 체제는 일과 육아, 일과 가정의 양립을 더욱더 불가능하게 한다. 이는 여성의 노동시장 이탈과 고용단절을 촉진함으로써 젠더 불평등을 강화한다.
2021년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38개국 중 5위를 기록했다. 이제는 장시간 노동체제로부터 탈피하여 존엄한 노동시간 원칙이라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까워져야 한다. 1919년의 ILO 제1 협약 원칙과 1944년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는 필라델피아 선언의 정신을 한 번 더 환기해보자. 지금 우리는 '오래된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다.
▲ 권혜원 /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 권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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