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광한루원, 춘향이만 떠올려서 미안합니다
[이완우 기자]
12일 오전 8시경 전북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칠팔십 마리의 원앙새 무리가 헤엄치며 잔설의 냉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오작교부터 춘향사당까지 연못 곳곳에 원앙새들이 모여 물 위에서 헤엄치기도 하고, 왕버들 나무 줄기에 올라가 햇볕을 쬐기도 한다. 오작교 돌다리 위에도 올라가 아장아장 걷기도 한다. 오작교의 명물인 잉어떼는 수심 깊은 곳에 조용히 머물고 있다.
▲ 광한루원 원앙새. 광한루원 겨울 연못에 아침 햇살을 받으며 원앙새들이 한가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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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한루. 광한루는 달 속의 이상 세계를 현실의 지상에 구현하는 노둣돌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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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은 남원 지역의 역사 문화와 생명력의 정체성이 잘 결합하여 있다. 광한루는 조선 초기부터 남원 관아에서 연회를 베풀기 위해 건축하고 점차 확장했다. 광한루는 상상 속의 달나라 궁전인 광한전(廣寒殿)에서 유래한다. 사농공상 신분 귀천의 차별이 엄격한 조선시대 사회에서 평등한 이상향을 광한루는 지향했다. 광한루는 달 속의 이상 세계를 현실의 지상에 구현하는 노둣돌이 되었다.
광한루는 황희 정승이 1419년에 광통루(廣通樓)를 지었고 전라감사 정인지가 광한루로 1442년에 개칭하였다. 요천수를 끌어들여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조성하였고 훗날 오작교가 놓였다. 전라관찰사 정철이 1582년에 연못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 瀛洲, 蓬萊, 方丈) 세 섬을 조성했다.
▲ 자라돌. 동해에 사는 큰 자라가 등에 삼신산을 업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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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 건물 옆에는 호수와 오작교를 바라보는 커다란 자라돌이 놓여 있는데 동해에 사는 큰 자라가 등에 삼신산을 업고 있다는 전설에 근거한다. 한라산을 상징하는 섬의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광한루 확장 공사 때에 건립하였고,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 때에 광한루와 만복사가 불타고 광한루는 1639년에 다시 지어졌다. 현재의 영주각 건물은 1794년에 재건한 것이다.
지리산을 상징하는 섬의 방장정은 삼신산을 형상화한 신선사상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60년 전에 지어졌다. 이 육모정 시공에 참여한 도편수 등의 이름을 방장각 마루 아래 표지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립정신의 구심점 역할을 한 광한루
▲ 방장정. 원래 네모정으로 단출하게 조성된 것을 육모정으로 고쳐 조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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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천한 집안에서 한 아이가 억새로 자기 탯줄을 자르고 태어났다. 이 아이는 지리산 산신이 점지한 아기로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서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아기장수 우투리라 불렀다. 우투리는 콩과 팥 등의 곡식을 가지고 바위 속으로 들어가 새 나라를 세우고자 실력을 길렀다.
이 설화에서 우투리는 하층민을 대표한다. 날개는 능력, 억새는 변화의 추구와 소망, 곡식은 농민이고 새 나라는 새로운 세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방해 세력에 의해 바위가 깨트려졌는데 콩과 팥이 군대와 말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우투리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이 설화는 백성들의 저항 의식과 바람직한 역사적 발전을 기대하는 뿌리가 되고 있다.
광한루와 오작교는 바늘과 실과 같이 견우와 직녀 설화와 성춘향과 이도령의 춘향전 이야기를 이어준다.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딸 직녀(織女)와 미천한 소몰이꾼 견우(牽牛)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 일 년에 칠석날 은하수의 오작교를 건너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애달픈 사랑의 전설이다.
▲ 오작교. 오작교는 사랑의 가교이며 이상향과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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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이루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춘향가의 사랑가 중 한 대목의 음률은 현실에 우뚝 서 있는 인습의 벽과 한계를 넘어서는 의미 있는 저항의 행동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광한루 동북쪽에 춘향 사당이 있다. 1931년에 건립한 춘향사당은 평양, 진주와 남원의 권번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동맹한 항일 정신의 표출이다. 판소리 춘향가가 춘향제의 원동력이 되어 1931년 6월 20일 단오 날 우리나라 지역축제로는 처음으로 춘향제가 열렸다.
▲ 춘향사당. 춘향사당은 평양, 진주와 남원의 권번이 중심이 된 항일 의지의 표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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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가 독립정신의 구심점으로 역할을 하자 일제는 광한루를 억압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광한루 문화재를 1918년 2월부터 10년간 남원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광한루 1층은 감옥이고 2층은 재판소였다. 수감자 중에 독립운동을 지원한 남원권번 소리 선생 김정문(金正文, 1887~1935) 명창이 있었다.
남원의 유자광
춘향전에서 이몽룡은 광한루에서 만난 춘향이가 5월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아름답다고 여기며 그네를 타는 모습을 보고 애정을 느낀다. 광한루는 봄날 연못가의 왕버들 나무의 멋진 자태가 인상적이다. 남원 지역에는 '남원 유자광(南原 柳自光)'이란 어구가 전승된다.
남쪽 언덕(남원)에 버드나무가 스스로 빛난다. 서얼 출신인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스스로 능력으로 조선시대에 정승 반열에 오른 역사적 사실을 남원 광한루원 연못가의 왕버들 나무를 보며 이야기 한다.
남원의 유자광은 조선시대에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과 중종 다섯 임금의 총신(寵臣)이었다. 그러나 무오사화 등의 원인 제공자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조선시대 양반과 사림(士林)의 공적이 되었다. 그러나 남원 지역 백성들에게는 유자광의 설화가 수백 년 동안 긍정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며 전승되어 왔다.
광한루 연못으로 흘러드는 요천의 상류에서 유자광은 이른 새벽에 은어를 잡아서 한양으로 축지법으로 달려갔다. 궁궐 수라간에 은어를 진상하고 지인들과 장기 한판 두고 남원으로 내려와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유자광의 비범함을 과장된 이야기로 서술한 설화이다.
백성들은 광한루의 오작교를 배경으로 춘향 이야기와 판소리 춘향가를 탄생시켜 평등 세상을 지향했지만, 양반과 사림(士林)들은 유자광에게 간신이라는 멍에를 씌어 신분과 차별의 벽을 굳게 세웠다.
▲ 버드나무. 남원 지역에는 ‘남원 유자광(南原 柳自光)’이란 어구가 전승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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