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인구 대책 없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용만(90) 전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산업화 시대 경제 정책의 실무부터 정책 결정 과정에까지 깊이 관여했던 한국 경제 성장의 산증인이다. 재무부 이재국장과 기획관리실장, 은행감독원장 등을 거쳐 노태우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 아흔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까지 골프 라운딩을 하는 등 체력을 자랑하고 있다. 고도성장기 경제·금융 정책을 담당했던 이 전 장관을 16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나 한국 경제의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이 전 장관은 “내가 공직에 있을 땐 남녀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는데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라며 초저출산·고령화 문제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는 “제대로 된 인구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면서 “대통령 직속기구가 아니라 기획재정부 아래 인구청 같은 전담기구를 두고 실질적이고 실효성 있는 인구 대책이 추진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구 감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인구 문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전 국민의 과제가 된 지 오래됐다. 경제 성장을 하려면 일정한 수준의 경제활동 인구가 유지돼야 한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속도로 인구가 줄어들다 보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기획재정부를 주무 부처로 해서 일관성 있게 대책이 추진되도록 해야 한다. 기재부가 인구대책을 주요 정책 목표로 설정해 연도별 목표와 성과를 공표하도록 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현재 대통령 직속기구도 가동 중이고 범정부 차원 대책도 추진 중인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는 기구이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정부 입장에선 인구 대책의 핵심은 예산과 세제의 문제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등 각 부처의 정책이 따로 굴러가고 지방자치단체도 제각각 대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렇게 산발적으로 하니까 돈만 쓰고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30년 이상 앞질러 미래를 내다보는 인구정책 계획을 세워야 한다. 대통령 직속 기구는 조직이 유연하고 속도감 있게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재부가 컨트롤타워를 맡는 조직이 적합해 보인다.”
-인구 문제와 함께 주의 깊게 들여다 봐야 할 부분은.
“노동개혁이다. 경제는 정치가 잘 안정되고 노사 합의가 잘 되면 저절로 돌아간다. 윤석열 대통령도 비슷한 취지로 말했는데 노동개혁은 당장 인기가 없더라도 반드시 추진돼야 하는 것이다. 외국기업이 들어와서 활동하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세제 지원 등이 이뤄져야 하고 국내 기업의 유턴 정책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경영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내가 노조의 도움으로 총리가 됐지만 독일의 장래를 위해 노동개혁이 불가피하다’고 했고 그 정책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이전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우리 경제에 주름살이 깊어진 사실이다. 소득주도성장과 주 52시간제 도입이 기업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이 어려워지고 국제수지도 악화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 정책을 건의한 사람들은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해 검토도 한번 안 해본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다. 임금 인상은 전년도 생산성 향상 수준의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하고 지역이나 업무 특수성에 따라 임금은 차등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근무시간을 탄력성 있게 보완한 시스템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
-현 정부 경제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직에 있을 때 ‘자고 나면 오르는 물가, 장바구니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들었고 관련 대책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정부가 방임 상태에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현재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오르는 수단에만 주로 의지하고 있는데 나는 좀 무책임하다고 본다. 코로나 확산기 2년간 추가로 풀려나간 돈이 134조원이나 되는 상황에선 정부와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대응이 있어야 했다. 인플레이션이 심한 품목을 별도로 관리하는 ‘아이템 바이 아이템’ 정책도 적극적으로 펴야 한다. 이런 얘기하면 ‘꼰대’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현재 물가 대책이 안일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후배한테 가장 일을 지독하게 많이 시켰던 장관’이라는 평도 있던데.
“나는 후배들한테 일을 그렇게 많이 시킨 기억은 없는데…. 재무부 과장을 맡은 이후로 아침 7시 이후에 출근한 적이 없다. 저녁 9시 이전에 퇴근한 적도 없다. 주말도 없이 일을 했다. 한번은 어느 사무관이 재무부 장관한테 투서를 한 적도 있다. ‘과장이 얼마나 무능하면 주말에 나오냐’는 내용인데, 장관이 그걸 나한테 보여주면서 일 많이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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