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침공' 간첩 활개치는데 막을 '방패'는 곳곳 구멍[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북한 추종, 중국 비밀조직 등 암약
기술·정보 노린 스파이들 서울 운집
여론 왜곡 등 '영향력 공작' 경계령
형법98조 '적국', '외국'으로 넓히고
미국식 '외국 대리인 등록법' 필요
대한민국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핵·미사일 등 북한의 전략무기뿐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닌 북한의 무인기는 눈에 보이는 비대칭 군사 위협이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국가안보를 야금야금 좀 먹는 세력도 있다.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가릴 것 없이 활개 치는 간첩들이다.
은밀한 간첩 활동은 몰라보게 진화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요즘 간첩은 더욱 은근하게 약점을 파고든다. 호주 찰스 스터트대학 클라이브 해밀턴 교수가 2021년 6월 한국에 번역 출간한 『중국의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이란 책 제목이 단적으로 표현한 대로다.
윤 정부 들어 다시 불거진 간첩 사건
존재를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첩의 '창'은 예리해졌지만, 이를 방어할 '방패'는 무디고 구멍이 많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댓글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사이버안보는 거의 범죄시 됐고, 간첩 잡는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지난 5년간 간첩 수사는 '충북동지회 사건'이 거의 유일할 정도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정원의 간첩 수사가 다시 부분적으로 재개되면서 여기저기서 암약하던 간첩들의 꼬리가 속속 잡히고 있다. 제주 한길회, 창원 민중자주통일전위, 전주 전북민중행동의 이름이 나오더니 급기야 민주당 출신 무소속 윤미향 국회의원의 보좌관까지 등장했다. 공안 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정권의 간첩 조작"이라고 반박하거나 묵비권을 행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의 남파 간첩이나 자생적인 종북 주사파의 간첩 행위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엔 외국인 간첩의 '조용한 침공'과 '영향력 공작'이 국가안보와 국익을 흔들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예컨대 스페인에 본부를 둔 비영리 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의 지난해 12월 폭로 내용이 충격적이다. 이 단체는 “중국이 ‘해외 110 복무 중심’이라는 이름의 비밀 경찰서를 한국과 일본 등 최소 53개국에 102곳 이상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 잠실의 중국 음식점 동방명주(東方明珠) 등에 대해 공안 당국이 빈 협약과 실정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고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되면서 산업 스파이도 기승을 부린다. BTS와 ‘오징어 게임’ 등 한류 열풍으로 한국이 매력 국가로 주목받자 각국의 주한 대사관에도 한국 근무를 희망하는 인재가 몰려들고 있다. 이는 동시에 한국을 노리는 글로벌 스파이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첨단 기술과 각종 정보를 노릴 뿐 아니라, 한국의 여론을 자기 나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심지어 왜곡하려는 동기와 의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손쉽고 좋은 먹잇감이 된 한국의 국익을 지켜내기 위한 수단들, 즉 방패는 얼마나 튼튼할까.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한 방첩(防諜) 대책은 튼실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시대 변화 못 따라가는 ‘형법 98조’
가장 큰 문제는 1953년 제정 이후 70년간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형법 98조'다. 98조1항은 '적국을 위하여 간첩 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 같은 명시적 '적국'으로 제한하다 보니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일본 등 외국 또는 외국 단체를 위한 스파이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 실제로 2015년 중국에 기밀을 유출한 해군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반면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은 반간첩법에 '외국기구·조직'을 명시했고, 러시아 형법에도 '외국과 외국 단체 및 그 단체 대표자'로 규정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경우 연방법에 '적국'이 아니라 '외국정부나 다른 외국의 적'으로, 프랑스 형법엔 외국 정부·단체·요원 등으로, 독일 형법에는 '타국'으로 간첩죄 대상을 명시했다.
석재왕 건국대 안보재난관리학과 교수(국가정보포럼 대표)는 "중국은 물론 미국 등 우방들도 한국 기업의 반도체·인공지능(AI)·배터리 등 첨단기술을 노린다"며 "상황이 이런데도 방첩 법제화 수준이 낮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국정원에서 26년간 활동한 석 교수는 "진보 정부가 북한을 화해의 대상으로 간주하면 '적국'이 아니므로 간첩들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녀도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간첩과 협력한 내국인만 처벌받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다"며 "적국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국가나 외국인·외국단체에 의한 간첩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상 간첩죄 구성 요건을 '적국' 대신 '외국'으로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인이 국익에 어긋나게 외국을 돕는 정보 활동을 하더라도 현행법에는 처벌 근거가 미비한 것도 문제다. 홍종현 경상국립대 법학과 교수는 "우호적인 국가라도 한국에서 자국에 유리하도록 한국 여론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선거에서 유리한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여론을 조작하는 '영향력 공작' 활동을 하더라도 현행법에는 처벌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며 "미국·호주·싱가포르처럼 한국도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호주·영국 등의 적극적 대처
예컨대 미국의 경우 1938년 영국이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 독일이 미국의 중립을 유도하기 위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자 대응 방안으로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을 제정했다. 외국 정부와 단체를 위해 활동하는 대리인의 사전 신고와 활동 사항 보고를 의무화했다. 이 법은 1946년 연방의회 의안 통과나 부결에 영향을 주기 위해 의원들과 접촉하는 행위에 관한 '연방 로비활동 규제법'(FRLA)보다 먼저 생겼다.
호주는 2018년 호주 내정에 간섭할 경우 처벌이 가능한 '외국 영향 투명화법'을, 싱가포르는 2021년 '외국 개입 방지법'을 제정해 중국이 해외에 설치한 공자(孔子)학원 운영 지침까지 마련했다.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제정하면 한국에 모종의 영향력을 끼치려는 공작 행위를 사전에 모니터링할 수 있고, 사후에 적발되면 처벌할 수 있다. 내정 간섭을 차단해 국가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대책인 셈이다.
외국 스파이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은밀한 정보 활동을 하면서 기밀 자료를 유출해도 차단할 방법이 지금은 마땅하지 않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합법적인 휴대전화 감청이 가능하지만, 전기통신사업자들의 휴대전화 감청 설비 구비를 의무화한 법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없다. 미국은 1994년 만든 통신감청지원법에 따라 정부 또는 통신사가 감청 설비 비용을 부담하고 영국·독일·호주도 유사하다. 한국 정부가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전쟁 상황이 아니라도 국익을 잠식하는 간첩 범죄는 철저히 막아야 한다. 첨단 ICT 시대에 간첩 활동은 국내외 구분이 없고,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국익을 지켜낼 튼튼한 방첩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간첩 안 잡겠다는 뜻...재검토해야"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대공수사는 국가의 존립이나 자유민주체제를 다루는 중대한 사안이다. 대공수사권을 밥그릇 싸움이나 조직 이기주의로 봐선 안 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20년 11월 민주당은 거대 의석을 무기로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을 단독 강행 처리해 2024년 1월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겼다.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 주도로 쐐기 박듯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경찰의 대공수사 역량 강화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인력을 줄였고 활동비를 삭감했다. 비전문가들이 지휘부를 장악했고 진짜 전문가들은 대공 분야를 떠났다. 경찰에 대공수사를 전담시킨 것은 문 정부가 대공수사를 아예 못하게 하려는 의도란 해석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 국민이 잘 알듯이 북한 간첩 수사는 국정원이 가장 잘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5년간의 바보짓’이라 했는데,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야말로 ‘국가안보의 탈원전’ 같은 중대 실책이다.
국가안보 관련 업무는 단일기관에서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보다 독립된 여러 기관이 촘촘하게 중첩해 수행하는 것이 좋다. 반복‧중첩 장치가 없으면 오류 발생 우려가 크다. 그동안 국정원‧검찰‧경찰이 중첩적으로 해오던 대공수사를 내년부터 경찰이 혼자 맡는다.
경찰은 2021년 충북동지회 사건 수사를 국정원과 함께했다. 제주 간첩단 사건과 윤미향 의원의 전 보좌관 간첩 사건도 국정원과 함께하고 있다. 합동수사라고는 해도 누가 주도하고 누가 따라가는지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경찰은 내년부터 과연 단독으로 대공수사를 할 자신이 있나.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는 재검토해야 마땅하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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