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청와대 비서관 “거수기 국무위원, 접시물에 빠져 죽어야”

주정완 2023. 1. 1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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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6〉 신군부의 특수계급 창설 시도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금수저와 흙수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선 수저 계급론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 헌법은 계급적 차별을 엄격히 금지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는 조항(헌법 11조 2항)이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고 세습을 용인하는 건 헌법 위반이란 의미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특수계급을 창설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 정부 초기의 일이다. 장교나 하사관(부사관)으로 전역한 직업군인에게 각종 특권을 부여하는 법안까지 만들었다. 전역군인에게 적절한 보상은 해야겠지만 특수계급에 준하는 특권을 주는 건 다른 차원의 얘기다. 그때 자리를 그만둘 걸 각오하고 법안 처리를 막는데 애썼던 사람들이 기억난다. 경제기획원의 이진설 경제기획국장과 이석채 기획4과장, 청와대의 김유후 법무비서관이다. 특히 이 국장은 권총을 찬 군인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줬다.

「 전·퇴역 장교·하사관에 특권 부여
국무회의서 토론 없이 통과시켜
“특수계급 창설, 명백한 헌법 위반”
권총 협박에도 끝까지 반대 관철

이진설 “이거 서명하고 그만둔다”

1982년 1월 26일 전두환 대통령이 김준성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에서 둘째)에게서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고 있다. 같은 해 1월 5일에 맞춰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중앙포토]

1980년 가을, 나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고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국보위)를 출범시켰다. 어느 날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에서 법안 하나를 가져왔다. ‘전·퇴역군인 원호에 관한 법률’이었다. 당시 각 부처에서 법안을 만들어 국무회의에 올리려면 경제기획원 협의를 거쳐야 했다.

담당 사무관인 내가 법안을 들여다보니 황당했다. 직업군인이 전역하면 국가가 일체의 사회보장을 책임진다는 내용이었다. 집도 얻어주고 의료비도 주고 자녀 교육비까지 지원하게 돼 있었다. 당사자는 물론 자녀의 취업까지 국가가 책임진다고 했다. 예산도 엄청나게 들었다. 이건 헌법이 금지하는 특수계급 창설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유는 짐작이 됐다.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또 다른 군사정변이었다. 육군 소장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됐으니 다른 세력이 또 언제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런 여지를 없애려고 직업군인에게 사회·경제적으로 최고의 혜택을 주는 법안을 만든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앞장서서 반대 의견을 냈다. 사회적 특수계급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근거로 들었다. 헌법 해설책을 뒤적거리며 스스로 연구했다. 내 나름의 헌법 해석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당시 유명한 헌법 학자이자 대학교수였던 세 사람을 직접 집까지 찾아갔다.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아예 말을 안 하려고 했다. 얼마나 폭발력이 큰 사안인지 딱 보고 아는 눈치였다.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다. 나는 답답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 말이 틀리면 틀렸다고는 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별 소득이 없었다.

그 중엔 진보 성향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학자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소신껏 말해주겠지 하고 기대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집 앞까지 쫓아 나오며 당부했다. “저를 만난 일도 아예 없는 거로 해주세요.” 나는 허탈한 마음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자리를 걸고 어렵게 찾아왔는데.’

사무실로 돌아와 법안 반대 의견서를 썼다. 이석채 과장과 이진설 국장은 결재를 해줬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이 국장은 “이거 서명하고 그만두지 뭐”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법안 의견서는 국장까지만 결재를 받으면 됐다. 그래도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이 과장과 같이 강경식 차관보에게 갔다. 그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놓고 가라”고 했다. 다음날 최창락 차관이 불러 엄청나게 야단을 쳤다. “당신들 정신이 나간 거 아니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원안 폐기하고 지원 대상 대폭 축소

이진설

그러다가 밖으로 말이 퍼져 나갔던 모양이다. 원호처 국장 세 명이 나를 만나러 왔다. “제발 저희 목숨 좀 살려주세요.” 국장 세 명이 좁은 자리에 끼어 앉아 나에게 빌다시피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30대 초반 사무관인 내가 ‘정말 철없는 녀석’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중엔 현역 군인이 권총을 차고 이 국장을 찾아왔다. 계급장에는 별이 세 개였다. “이 법안에 반대하면 신상에 좋지 않을 겁니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이 국장은 내색하지 않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거 끝까지 반대. 밀고 나갑시다.”

그 후 법안은 차관회의와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마지막 단계인 국보위에서도 법안을 통과시키면 법률로 확정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청와대에서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검사 출신의 김유후 비서관이었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쭉 살펴보다가 ‘이건 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경제기획원에선 반대했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과장과 함께 청와대로 불려갔다. 김 비서관은 물었다. “왜 법안에 반대했습니까.” 나는 이 법안이 헌법 위반인 이유를 대강 설명했다. 조금 듣더니 김 비서관은 한마디를 했다. “우리나라 국무위원들 전부 다 접시물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법을 아무 토론도 없이 통과시킬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만든 법안 반대 의견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이후 김 비서관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법안에 제동을 걸었다. 국무회의까지 통과한 법안을 없던 일로 했다.

이듬해 3월 국무회의에선 지원 대상자 등을 대폭 축소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사관 출신 중에서도 생활이 어려운 사람만 선별적으로 도와주는 내용이었다. 장교 출신은 아예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국회를 대신한 국보위에선 법안을 그대로 확정했다. 81년 4월부터 시행한 ‘국가유공자 등 특별원호법’ 개정안이다.

얼마 뒤 이 국장은 초대 공정거래실장(1급)으로 승진했다. 나는 내심 걱정했는데 이 국장의 승진 인사를 보고 마음이 놓였다. 당시 법안 반대 의견서에 결재한 두 사람은 나중에 각각 건설부 장관(이진설)과 정보통신부 장관(이석채)까지 올랐다. 나도 그때 일로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 법안 통과를 막아준 건 김 비서관이었다. 지금도 그가 말한 ‘접시물’이란 표현이 잊히지 않는다.

통행금지 해제, 컬러TV 허용

80년대 초반은 경제·사회 분야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경제기획원이 제안했던 몇 가지 자유화 조치도 이뤄졌다. 그중 하나가 통행금지 해제다. 그 전에는 밤 0시부터 오전 4시까지 특별 허가증이 없으면 거리를 다니지 못했다. 통행금지 위반으로 단속되면 파출소(경찰 지구대)에서 꼼짝 말고 밤을 보내야 했다.

경제기획원에선 통행금지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을 꾸준히 냈다. 대략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경제 활성화에 방해가 된다는 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글로벌 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한창 일하는 낮에 우리는 통행금지에 묶여 있었다. 둘째로 북한에도 없는 통행금지를 남한이 계속 유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82년 1월 5일 통행금지가 사라졌다.

컬러TV 허용도 큰 변화였다. 그 전에 박정희 대통령은 컬러TV라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TV는 부의 상징이었다. 여기에 컬러TV까지 허용하면 계층 간 위화감이 커질 것이라고 봤다. 수출용으로는 컬러TV를 생산하면서 내수용으로는 금지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경제기획원에서 컬러TV 허용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강경식 차관보였다. 그는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소비 촉진 방안으로 컬러TV를 주장했다. 80년 우리 경제는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컬러TV 내수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고 발언한 게 각 신문에 중요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80년 12월 시험방송을 거쳐 이듬해 1월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컬러TV 방송 시대가 열렸다. 이후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TV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했다.

인구억제 정책 유지, 뼈아픈 실책

지나고 나서 보니 크게 잘못한 정책도 있다. 인구억제 정책이다. 나는 79년에 처음으로 해외로 나가봤다. 미국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인구 정책을 주제로 세미나를 했다. 인구증가를 왜 억제해야 하는지, 가족계획은 왜 해야 하는지 등을 선진국의 시각에서 가르치는 행사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80년대에 정부가 내세운 가족계획 표어였다. 늦어도 84년에는 인구 정책의 방향을 출산 억제에서 장려로 돌렸어야 했다. 84년은 합계 출산율이 2명 이하로 내려갔던 해다. 그때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저출산 대책을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84년부터 따지면 20년가량의 세월을 잃어버린 셈이다.

전두환 정부는 강압적 통치를 했지만 한편으론 경제 논리에 충실한 경제정책을 펼 수 있게 방패막이가 되어준 측면도 있었다. 경제기획원에 있다가 청와대로 들어간 김재익 경제수석의 영향도 컸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정치적 외풍에 휘둘리지 않는 경제정책의 가치는 변한 게 없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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