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가장 귀한 것은
오랜 세월 잊히지 않는 사람 중에 Y 여사가 있다.
그녀는 우리 미용실의 단골손님이다. 슬하에 세 자녀를둔 Y는 어린 자녀들 양육과 사업을 위해 밤낮으로 매달려있는 남편의 자리까지 채워 가며 일인이역을 감당하는 헌신적인 주부였다. 일에 빠진 남편 때문에 외로웠을까.
남편은 단란한 가정의 행복보다 사업 성공에 가치를 둔사람이라고 그녀는 내게 귀띔해 주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상담차 두세 번 나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녀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곤 했다. 체력을 다 소진할 만큼 전력을 다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력 끝에성공이라더니 어느 날 Y의 남편은 소원하던 대로 큰 뜻을이루었다.
우리의 생각은 종잇장처럼 얄팍한 것일까. 그는 차츰 주색잡기에 빠져 갔고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거칠어졌다. 남편의 외도와 타락으로 짓밟힌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디다못해 Y는 세상을 등지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녀는 목숨이 질기더라는 말을 하며 오열을 참지 못했다.
“부자가 되고 싶었는데 부잣집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될 즈음에 사랑이 날아가 버렸어요. 헛꿈을 꾼 것처럼 모든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돈과 남편을 바꾼 셈이지요.”
Y는 한숨을 쉬면서 몇 가락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고통으로 지새우던 어느 날 아침 그녀의 베개 위에는 한주먹이나 되는 머리카락이 빠져 있었다. 날마다 손을 댈수 없을 만큼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여섯 달이 된 후에는완전히 민둥산이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에 그녀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울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인생의 무게가 그녀를 고뇌 속에 가두었고 긴 시간 견딤이 필요했다. 사람의 근심은 뼈를 상하게 한다는 말이 그녀의 몸에서 현실로나타났다.
슬픔은 가벼울 리가 없다. 사라져 버린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몸부림치며 통곡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 가닥의 머리카락까지도 남김없이 빠져 버려 평생 가발을 쓰고 살아야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머리카락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면 무엇이든 실천했다. 솔잎을 따다가 두피에 자극을 주기도 했고, 침술로, 한약으로, 중국과 일본의 명의들에게도 진료를 받았다. Y 여사는 두피에 모세혈관이 막혔다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았다. 한 번 떠나간머리카락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절망 앞에 휘청이는 그녀에게 사람 노릇 한번 해 보겠다며 남편이 손을 내밀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아내에게속죄하는 마음으로 비방책을 찾아다녔다. 남편은 새벽시간 아내를 태우고 도축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막 도살된소의 간을 받아 그녀의 머리에 덮어 씌웠다. 남편은 그러한시술이 죽은 모근을 생성시킨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Y는 마구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남편에게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못 견디도록 괴로웠다. 남편은 아내가 비구니의 모습으로 변한 것은 자신의 사업에도 어려움이 있을 징조라면서 불안해했다. 삶이 고달파 영혼을 집어삼키는 일도 끝이 있게 마련이다. 남편은 밤낮없이 상처를주더니 결국 그녀 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기로 했다. 고민을 안은 그녀는 탈모에 관한 전문가를 찾다가 나를찾아온 것이다. 그녀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녀에게 아직은 젊었으니 언젠가는 머리카락이 다시 솟아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부탁했다. 다른 신체의 장애와는 달리 패션 감각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타일에 맞는 가발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얼굴빛이밝아졌다. 그녀가 가발을 쓰고 용기 내어 일상생활을 하는것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가끔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그녀가 웅크린 마음을 툭 던졌다.
“원장님의 헤어스타일이 부러워요. 모발을 모시고 사십시오. 저는 잘 때도 가발을 쓰고 자요. 행여 밤중에라도 아이들이 제 모습을 보고 놀랄까 봐 하루도 민둥산이 돼 버린 모습을 노출한 적이 없어요.”
여름철 삼복더위는 그녀를 주저앉게 할지도 모른다. 에어컨을 끄면 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에어컨을 켜면 몸이 추워서 밤새도록 뼈가 저리다고 했다. 시련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그 의지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 뿌리는 정신이고 마음이다. 허물어지지 않는 그녀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원장님, 나는 모든 여성에게 모발을 귀하게 여기라고당부합니다.”라고 하던 그녀의 간절한 고백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끔 잊어버리고 산다.
옛 어른들은 봉두난발이라며 머리 풀어 산발한 여자를미친 여자로 취급했다. 동백기름을 곱게 발라서 단정하게머리 손질을 한 여인을 지조 있는 여자로 생각했다. 두발을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교양과 인격을 판단하기도 한다. 날마다 미용실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숱한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존재다.나는 머리카락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가 없다.
<춘설이여>
저만치서 바람이 몰아쳐도
초연하게 서 있는 유실수
묘목으로 뿌리내리고
맨몸으로 몇 해던가
뒤쫓아 온 폭우여
청초하던 깃발도 다 꺾이고
내 자랑이던 보석 열매들
제 것인 양 서리해 가도
원망하지 않았다
후려치는 비바람이여
곧은 내 자존심 앗아 가고
빛바랜 마지막 잎새마저
탐하는 모진 바람아
다 털어가고 꺾인 내 어깨
동여매어 준 하얀 눈꽃 붕대
내 영혼의 갈망 채워 주려
마디마디 덮어 주네
부활의 계시를 일러 주려나
생명을 싹 틔우려 다가와
지긋이 감싸며 이르는 말
잃어야 얻는 것을
죽어야 사는 것을
영혼을 깨우는 백옥 눈발이여
고결한 자태로 쉼 없이 날아와
어두운 세상 덮어 다오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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