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세계화, 그 중심엔 '이것'이 있다
[성하훈 기자]
▲ 봉준호, 박찬욱, 황동혁 감독 |
ⓒ 이정민 |
2019년 칸영화제와 2020년 아카데미상을 휩쓴 <기생충> 봉준호 감독, 2022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2022년 에미상을 받은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
최근 한국영화를 빛내고 있는 이들 감독이 갖는 공통점 중 하나는, 다들 한국 영화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 주역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봉준호는 대학 재학시절 민간 시네마테크였던 이언경(감독)의 '영화공간1895'를 드나들며 영화의 꿈을 키운 경우였다. 박찬욱 감독은 1985년 서강대 영화동아리 영화공동체가 만들어질 때 초기 회원 중 한 사람이었다. 황동혁 감독은 한국영화운동의 출발과도 같은 서울대 영화연구회 얄라성 출신이다.
이들 외에 <명량> <한산 : 용의 눈물> 김한민 감독은 연세대 영화동아리 프로메테우스에서 활동했고, <말아톤> <대립군>의 정윤철 감독은 영화공간1895의 막내였다. <도둑들> <암살> <외계+인> 최동훈 감독은 서강대 영화공동체에서 활동하며 '씨앙씨에'와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화의 꿈을 키웠다.
이렇듯 영화운동은 한국영화의 중추적인 감독들을 키워낸 근원이자 발판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 한류 확산에 크게 기여하면서 한국영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1980년대 전후 영화에 관심 있던 젊은이들이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대학에서 영화동아리를 만들었다면,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학 안에서의 창작 시도와 다양한 영화제, 시네마테크 활동 등이 곁들여지며 영화에 빠진 청년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영화라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게 한 것이다.
독재 권력에 저항했던 한국 영화운동
1960년대~1970년대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에서의 영화운동은 기존의 영화적 흐름에서 탈피해 새로운 형식과 내용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반면 한국 영화운동은 여기에 더해 도드라진 특징이 있었으니, 바로 독재 권력과 맞서 온갖 검열과 제약과 걷어내고 투쟁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쟁취해냈다는 점이다. 외국 영화운동과 비교해 한국 영화운동이 갖는 큰 차이로, 영화의 변방에 있던 사람들이 기득권 체제와 맞서 끝내 중심을 차지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영화의 변화를 원한 젊고 개혁적인 영화인들의 지속적인 투쟁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주도 세력 교체로 나타난다. 해방 이후 공고했던 충무로 구체제가 밀려나게 된 것이다.
1996년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1997년 막을 올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000년 첫발을 내디딘 전주국제영화제 등은 한국영화가 해외로 뻗어 가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후 한국영화의 대외적인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영화운동이 이뤄낸 성과였다.
그렇지만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권력에 맞서 투쟁으로 성장한 영화운동이었기에, 독재적인 사고를 하는 정치 권력과 부딪히는 것은 숙명과도 같았다.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열며 성장을 거듭하던 영화운동은 2000년대 후반 다시 집권 세력과 부딪힌다.
2008년 등장한 이명박 정권이 집권 초기 문화예술계 좌파들을 청산하겠다며 온갖 전횡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박근혜 정권으로도 이어졌다.
어렵게 구축했던 독립예술영화관과 영상미디어센터의 성과가 심사 부정 논란을 일으킨 후 사라지다시피 했고, 주요 국제영화제가 표적이 되면서 한국영화는 곳곳에서 권력과 강하게 충돌했다. 당시 탄압을 목적으로 자행한 '블랙리스트'는 법원에서 국가범죄로 규정될 정도로 보수 권력이 세상을 군사독재 시대로 돌려놓기 위해 저지른 만행이었다. 통제와 제약의 시대로 세상을 후퇴시키려 한 음험한 술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편향된 시선으로 문화예술을 대하던 수구세력들의 오만이었다. 이에 맞선 한국영화의 투쟁은 치열하면서도 끈질겼다. 어렵게 쟁취해낸 표현의 자유를 왜곡하고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영화운동을 바탕으로 성장한 한국영화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구시대적 작태였기 때문이다.
▲ 부산영화제 사태 부산영화제를 향해 연대와 지지를 표명한 전 세계 영화인들 |
ⓒ 부산영화제 제공 |
2014년 <다이빙벨> 상영 이후 검열의 망령을 깨우려했던 부산영화제 사태는 한국영화와 보수적 정치 권력 간 충돌의 정점이었다. 한국영화는 전 세계 영화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를 결연히 분쇄했다. 불편한 영화를 온갖 압박을 가해 막으려 했던 군사독재식 발상은 한국영화의 지치지 않는 저항을 이겨낼 수 없었다.
1980년대 이후 반독재 투쟁에 동참해 영화의 기본적인 권리를 쟁취해냈던 영화운동의 역사를 정치 권력이 너무 가볍게 본 것이었다. 일부 안타까운 희생이 따르기는 했으나 한국영화의 물러섬이 없는 저항은 표현·상영·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꺾일 수 없는 의지를 확인시켜줬을 뿐이다.
충무로 구체제와 갈등에서 화해로
이 과정에서 예전 갈등했던 일부 원로영화인들은 묵은 감정을 누그러뜨리게 된다. 부산영화제 사태가 해소된 이후 1990년대 충무로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던 구체제 원로영화인들과의 화해가 이뤄진 것은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1990년대 이후 신구대결 또는 보혁대결로 충무로 내부에서 대립했던 영화운동 세력과 충무로 구체제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한국영화를 바꾸려는 진보적인 젊은 세대와 기존 체제에 안주하려던 보수적인 원로 세대의 주도권 대립은 어느 한쪽이 양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충무로의 균형추를 기울게 했다. 새로운 형식으로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어 성과를 내는 젊은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려난 구체제는 서운함이 많았던 탓에 한국영화의 현안에 젊은 세대와 사사건건 대립했으나, 흘러간 물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원로영화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세대교체 등으로 충무로 환경이 많이 바뀌면서 진보와 보수의 극심했던 대결 구도도 완화됐다.
실력을 앞세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의 주도권을 차지한 이후, 보수적인 세력은 원로들 외에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고 존재감도 적었다.
▲ 정진우 감독, 영원한 영화인의 핸드프린팅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주인공인 정진우 감독(왼쪽)이 10월 4일 오후 부산 해운대 비프빌리지에서 열린 핸드프린팅을 마친 뒤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안내에 따라 취재진을 향해 들어보이고 있다(2014.10.04). |
ⓒ 이정민 |
2018년 1월 영화제의 독립성과 상영의 자유를 지키는 과정에서 강제로 쫓겨났던 부산영화제 이용관 이사장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추천서를 쓴 것은 정진우 감독이었다. 부산영화제가 이사장 공모 절차에 들어가자 정진우 감독은 "이용관 교수는 한국 최고의 전문가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기에 영화제를 이끌기에는 가장 적합하다"며 추천서를 보냈다고 한다.
정진우 감독은 1980년대 영화인협회 이사장 경력에서 보듯 보혁갈등 과정에서 원로영화인들을 대표해 젊은 영화인들과 대립했던 보수 원로의 상징적인 영화인이었다. 그러나 2014년 부산영화제 <다이빙벨> 상영에 대해 상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영화인으로서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60년~1980년대 군사독재시절 자식과도 같은 필름이 무수히 잘려나가고 검열기관이나 정보기관에 불려가 영화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경험이 작용한 탓이었다. 시대적인 한계로 인해 만들고 싶던 영화를 맘껏 제작할 수 없었던 울분을 후배들이 겪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도 작용한 것이다.
갈등에서 화해로
2019년 6월 13일 저녁 서울 이촌동의 한 일식집에 정진우 감독과 김지미 배우, 부산영화제 이용관 이사장과 당시 오석근 영진위원장, 주진숙 영상자료원장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지미 배우가 한국에 들어왔던 때에 맞춰 정진우 감독이 주선한 자리였다. 한국영화의 선후배가 모처럼 만난 것으로, 옛날 갈등을 잊고 화해하자는 목적이 있었다.
한국영화의 신구세대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목적은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들은 한국영화의 숨겨진 이야기를 나눴고, 지난 시절의 앙금이나 서운함의 기억은 추억으로 남기며 털어내는 분위기였다.
이 자리에서 이용관 이사장은 정진우 감독과 김지미 배우에게 부산영화제에서 두 분이 함께하는 행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한다. 좋은 분위기 속에 두 원로가 함께하는 행사를 만들고 싶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었다.
정진우 감독과 김지미 배우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두 사람 모두 예전 부산영화제에서 회고전을 치르기는 했으나, 부산영화제 처음 시작할 당시 영화인들이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 번 더 돕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한국 최고의 감독과 배우의 건재함을 보일 수 있다는 의미도 컸고, 탄압을 딛고 정상화된 부산영화제에 원로영화인들이 함께하는 상징성도 작지 않았다.
▲ 2019년 7월 29일 부산 영진위를 방문한 정진우 감독과 김지미 배우. 김지미 배우 뒷편 당시 김혜준 공정환경센터장 |
ⓒ 영진위 제공 |
2019년 7월 29일 행사 논의 등을 위해 부산을 찾았던 날. 정진우 감독과 김지미 배우는 영진위를 방문했다. 전설적인 한국영화 감독과 배우의 등장에 영진위는 두 팔 벌려 환영을 받았다.
여기서 재밌는 만남이 이뤄진다. 당시 오석근 영진위원장의 안내로 영진위 내부를 둘러보던 김지미 배우가 어느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바로 앞에 당시 공정환경센터장이었던 김혜준이 서 있었다. 순간 김지미 배우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마디 했고, 순간 김혜준은 김지미 배우를 와락 껴안는다.
1990년대 충무로 신구세대 갈등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김혜준은 민족영화연구소에 이어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했으나 1998년 김지미 배우가 영화인협회 이사장에 재선된 이후 영화인협회 안에 있던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실은 자리를 내줘야 했다.
영화인협회와 대립하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젊은 영화인들이 1999년 영화인협회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인회의'를 만들던 때 실무를 주관했던 인물 중 하나가 김혜준이었다.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정책전문가였던 김혜준의 역할은 계속됐다.
신구세력의 충돌 과정에서 대립했던 사이였기에, 20년 만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김지미 배우가 내뱉은 한마디는 그 오랜 시간의 감정을 압축한 것이었다.
'멋진 배우로 기억될 분이 근무지에 오셨다. 마침 부산에 있어서 뵐 수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는 게 사람의 본성인 것 같다. 나를 보시더니 "이 사람 때문에 내가 고생 꽤나 했지!" 하신다. 나는 얼른 반갑게 꼭 껴안아 드렸다. 이분, 우리 큰 누이뻘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럼 없이 이렇게 친숙함을 나타낼 수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물론 아니다. 세월이 흘렀고, 20년도 훨씬 지난 일의 시시비비를 따져서 무엇하겠나 싶어서다. 이분 처지에서는 분명 당신을 불편하게 했던 존재였던 것도 사실일 테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서, 영화진흥 재원 조성의 배경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랬다.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당당했던 배우가 만년 야당의 후보를 지지했었고,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멋졌던 배우는 공직에 나섰고, 그 선택이 자신과 젊은 세대를 한때 서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이분은 지금도 당당하시고 멋지시다. 공직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냥 직장 다니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영화인임을 명심하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귀담아들었을까? 부디 그랬기를!
100년의 역사를 만들어온 한국영화. 그 길에 60년 이상 기여해 온 분들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날 영진위가 마련한 만찬 자리에서 김지미 배우는 옆자리에 앉은 김혜준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김혜준은 "'예'라고 대답했다"며 이렇게 술회했다.
"이런 일은 당신이 해야지!" 몇 가지 당부 말씀에 일단 예 하고 대답해드렸다.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싶어서. 17세에 배우로 나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 그분의 이타적 바람을 일단 받아 안고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전무후무했던 문화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함께 기억하는 일도 다른 사람들과 도모해보기로 한다."
▲ 2019년 부산영화제 커뮤니티비프 '김지미를 아시나요' 행사가 끝난 후 함께 자리했던 영화인들과 기념촬영 모습. |
ⓒ 부산영화제 제공 |
2019년 부산영화제. 커뮤니티비프의 주역은 김지미였다. 남포동은 김지미 배우를 보려던 관객들로 가득 찼다. 오래전 찍은 사진을 들고 직접 만나러 온 나이든 노년 팬의 열정에 김지마 배우는 감격했고, 여전한 팬들의 사랑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정진우 감독과 김지미 배우의 대담은 오랜 시간 쌓인 감독과 배우의 애정도 엿보게 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부산영화제 커뮤니티비프는 초기 두 원로영화인 덕분에 큰 힘을 받을 수 있었다.
영화운동은 현재 진행형
한국영화의 진보 개혁적인 성향을 불편해하는 수구 기득권세력들은 한국영화계를 좌파세력이라 지칭하고 있다. '독립영화를 독립운동하는 영화로 생각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권 때처럼 청산의 대상으로 보는 극우적 시각도 여전히 남아 있다.
▲ 1989년 16mm로 제작한 첫 광주항쟁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 촬영을 마친 후 장산곶매 스태프들. 아래줄 왼쪽부터 장동홍 감독, 장윤현 감독, 김동빈 감독, 오정옥 촬영감독, 김선경 배우, 이재구 감독,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이은 대표, 네번째 오지혜 배우. |
ⓒ 장산곶매 제공 |
검열로 대표되는 온갖 통제에 맞서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싸웠던 영화인들은 1980년대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상황에서도 독재체제에 맞서왔다. 1990년대 권력이 불법 제작으로 덧칠해 탄압했음에도 자유로운 영화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불법 비디오를 통해 퍼졌던 해외예술영화는 시네마테크 운동이 저변을 넓히며지금 한국영화 발전의 훌륭한 밑거름이 됐다.
기득권 체제에 맞선 비판적인 사고는 한국영화가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고, 검열 철폐와 표현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민주화가 약한 나라들에서 영화산업이 발전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이 정치 권력의 압박에 굴복하기 때문인데, 한국 영화운동은 이를 깨뜨린 것이다.
1980년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나, 지금도 한국영화 세계화의 바탕인 영화운동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부당한 권력의 압박에도 꺾이지 않고 약자들과 연대하며 '영화로 세상을 바꾸자'는 정신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사는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영화의 자랑스러운 자산으로서 영화운동의 역사를 새겨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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