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좀비 버전? 낯설지만 익숙한 서사

서형우 2023. 1. 16. 12: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뷰] 영화 <웜 바디스>

[서형우 기자]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색다르다. 두 가지 장르, 그러니까 좀비물과 로맨스물이 결합된 좀비 로맨스물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혼종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영화의 내러티브는 부드럽게 흘러간다. 왜일까.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오마주다. 원작은 몬테규가와 캐퓰렛가의 대립, 양가 가문의 소년과 소녀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그린다. <웜바디스>는 인간과 좀비와의 대립, 인간 소녀와 좀비 소년 간의 사랑이 서사의 주된 내용이다. 등장인물 이름도 그대로 따랐다.

여주인공은 줄리(줄리엣), 남주인공은 R(로미오), R에 잡아먹힌 서브 남주인공은 페리다. 페리는 원작에서 줄리엣의 약혼 상대자인 패리스와 이름이 비슷하다. 그 역시 로미오에게 죽임을 당한다. 줄리와 R이 달빛이 내리는 밤 테라스 난간에서 재회하는 장면은 이미 영화로도 재현된 바 있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1968)의 오마주임을 알리고 싶은 감독의 집착이 작용했다.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다른 21세기 미국임에도,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중세 이탈리아풍 건축물까지 그대로 본을 땄으니 말이다.
 
 영화 <웜바디스> 스틸 이미지.
ⓒ 서형우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좀비 버전 정도로 단순화시켜선 안 된다. 함축된 바가 다르다. 원작은 가상의 두 가문을 설정함으로써 관객과 거리를 뒀지만, <웜 바디스>는 그 범위를 인간과 좀비 간의 대립으로 확장했다. 일반적인 좀비물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인간의 관점에 서서 좀비를 '따돌리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웜 바디스>는 이런 통념을 비틀어 인간-좀비 간의 관점을 도치한다. 서사를 이끄는 주역은 어디까지나 좀비인 R이다. 기존의 좀비 영화에서는 인간이 관찰자로서 좀비를 대상화시키지만, <웜 바디스>에서는 주체로서의 좀비가 역으로 인간을 관찰하고 관망한다. 이렇게 되면 당사자에 속하는 관객으로선 거부감이 들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편안하고 따스한 기분이 느껴진다. 오히려 좀비의 편에서 좀비를 응원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낯익은 낯섦

답은 감독의 의도적 표현에 있었다. 좀비물과 로맨스물은 그동안 접점이 없던 탓에 새로운 시도를 납득시키려면 감독 나름대로 고민을 해야 한다. 지나치게 낯선 영화는 영화에 대한 극의 몰입을 떨어뜨려 당혹감을 남긴다. <웜 바디스>에는 이런 고민의 흔적이 담겼다.

먼저 카메라의 시점이다. 흔히 카메라의 시점이 누구의 시점이냐에 따라 관객이 동화되는 대상은 달라진다. 기존의 좀비물에선 카메라가 철저히 인간중심적이었다. 인간의 시점에서 좀비를 비추고, 관객은 카메라에 비친 좀비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공격당하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그 결과는 공포와 절망, 카타르시스다.

<웜 바디스>에서 시선은 R에게 맞춰졌다. 극 초반에 좀비를 소탕하러 내려온 인간 부대원과의 대립 장면,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페리의 기억 모두 R의 이미지와 기억을 토대로 한다. 카메라의 물리력은 관객 내면에 깊숙이 침투한다. 이에 따라 관객은 자연스레 R의 입장과 관점을 획득한다. 관객은 좀비를 이해하게 되고 그런 좀비를 공격하는 인간은 매몰차고 차가운 대상으로 전락한다. 다만 관객과 등장인물 간의 간극이 너무 클 때 감독은 부가적인 장치를 도입해 차이를 좁혀야 한다. R에게 약간의 의식을 부여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좀비들은 감정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인격체다. 이는 관객이 좀비를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다음으론 힘의 불균형이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보이는 쪽을 응원하는 경향이 있다. 기존의 좀비 영화에서는 인간이 좀비를 무찌를 방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절망과 공포 속에서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처절하게 투쟁해야 했다. 그런데 <웜바디스>에서는 이런 힘의 불균형이 무너졌다. 오히려 좀비들이 측은하고 불쌍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뭐가 이리 느려. 가다가 날 새겠네." "저게 내 미래야. 진짜 좌절이다." 좀비가 인간에게 위협이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빠른 스피드, 둘째, 타고난 신체적인 힘, 셋째, 압도적인 물량. <웜 바디스>에서의 좀비는 이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느린' 좀비는 좀비 영화에서는 일반적이었다. 2000년대 이후 <새벽의 저주>(2004), <월드워Z>(2013) 같은 빠르게 달리는 좀비가 등장하면서 그런 관습은 깨졌다. 확실히 이쪽이 관객에게 훨씬 박진감을 주기 때문에 최근에 상영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좀비는 대부분 빠르다. <웜 바디스>에서는 고전적인 느린 좀비의 특성을 취했다. 간혹 번뜩이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순발력과 스피드는 없다. 물리력의 측면에선 인간보다 다소 세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도 인간이 거리를 두고 싸우면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좀비들이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장면도 없었다. 오히려 인간성과 비인간성 간의 교묘한 경계에서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성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노출하면 '보니'에게 공격받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을 완전히 놓을 순 없다. 내재된 희미한 인간성은 인간을 맘 놓고 먹을 수도 없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좀비가 니콜라스 홀트다. 아무리 좀비라도 얼굴이 니콜라스 홀트라면 좀비와 인간이 서로 사랑을 한다는 설정이 설득력 있지 않을까. 나아가 좀비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우의 외형이 관객에게 주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영화 <군도>(2014)에서 주인공인 하정우와 악역인 강동원 중에서 강동원을 응원하는 이가 더 많다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주인공이 R이 아니라 그의 친구 M이었다면 애초에 좀비와 로맨스의 결합은 성립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놓쳐버린 것

좀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지금껏 없진 않았다. 만화 <귀멸의 칼날>이 대표적인 예. 주인공 탄지로는 오니, 그러니까 좀비가 된 여동생인 네즈코와 함께 여정을 떠난다. 목적은 네즈코가 인간이 되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좀비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점이다. 좀비와 귀멸대원들이 전투를 치르고, 전투 막바지에 상대 좀비의 인생을 되짚는 플롯의 형태를 띤다. 좀비가 되기전 저마다 불우한 환경을 버텨야 했고, 그 도피처로서 좀비의 삶을 선택한다.

작가는 좀비들을 매력적으로 그려내 독자들이 좀비의 삶을 공감하고 이해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좀비를 응원하는 팬층도 상당히 두텁다. 좀비를 악으로만 봐온 이전의 작업에선 많이 멀어졌지만, 여기서의 관점 역시 인간중심적이다. 좀비는 여전히 싸워서 이겨내야 할 대상이었고, 좀비가 안타까운 사정에 놓였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이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의 정당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영화 <웜바디스> 스틸 이미지.
ⓒ 서형우
<웜 바디스>는 이런 구도를 벗어난다. 좀비는 인간이 싸워서 이겨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 외에 제3의 선택지, 즉 포용과 화합이 가능하다고 감독은 말한다. 좀비 영화의 일반적인 결말은 이것이다. 백신 개발을 통해 좀비를 치료하거나,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암울한 세계의 모습을 조망하며 끝이 나는 것. <웜바디스>는 따지고 보면 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에 약간의 변주를 가미한다. 백신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약물과 같은 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문제해결 주체가 인간에서 좀비로 바뀌었다는 점은 더욱 놀랍다.

줄리에게 먼저 사랑에 빠진 좀비 R. 몸 상태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좀비들.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줄리를 찾아간 R.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 스스로 사람이 된 것을 입증한 R. 이때 인간은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라지오 장군과 R의 첫 대면 장면에서 그라지오 장군은 R을 좀비라는 이유로 죽이려 한다. 좀비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인간을 객체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화합 이면에 소외된 또 다른 좀비, '보니'에게 왠지 모를 마음이 쏠린다. 감독은 보니를 반면교사 삼아 '희망'이란 키워드를 끄집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떠한 어려움에 있더라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해." 이런 식으로 좀비에게 희망을 강요하는 것은 다소 과한 측면이 있다. 좀비가 된 현시점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원해주리라고 생각하는 좀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더욱이 보니는 '희망을 잃은 자'가 아닐 수도 있다.

감독은 R의 독백을 통해서 이를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할 뿐, 보니의 입장은 나오지 않는다. 즉, 좀비의 관점에서 또 다른 좀비를 재단하고 대상화시킨 것이다. 또 한 가지. 좀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공격하는 인간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도록 관객을 유도하면서 인간과 좀비가 합심해서 보니를 몰아내는 장면을 '통쾌함'으로 포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보니와 좀비 연합군 간의 대립은 그동안 숱하게 답습해온 인간과 좀비 간의 이분법적 대립항의 연장선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