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당시 휴대폰만 만지작" 빌라왕은 누구였나
[이준목 기자]
▲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 SBS |
1000채의 빌라를 소유하고 있어서 본명보다 '천빌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한 남자, 종로와 이태원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유명했다는 그는 한동안 종적이 묘연하다가 지난 2022년 10월, 종로의 한 모텔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향년 43세, 재력가의 정체는 바로 '빌라왕 김씨'였다. 그리고 그의 행방을 애타게 추격했던 사람들의 정체는 김씨 소유의 집에 거주하고 있던 세입자들이었다.
1월 14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빌라왕과 킹메이커' 편을 통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빌라왕 사태와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조명했다.
빌라왕 김씨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많은 세입자들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를 입는 사태가 발생했다. 피해자 이종찬씨(가명)는 전세 계약 후 불과 한 달 뒤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집주인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 집주인과 현 집주인 모두 이 사실을 세입자에게 알리지 않았다.
바뀐 집주인이 바로 빌라왕 김씨였다. 김씨가 사망하면서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는 '집주인이 사망했을 때의 대처방안은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무책임한 답변이 돌아왔다. 종찬씨는 이 사건과 맞물리며 당첨된 주택청약조차 무산되고 위약금까지 내야하는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종찬씨보다 한 달 먼저 김씨 소유의 집에 입주했다는 피해자 이주현씨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고 "너무 막막하다. 앞이 깜깜하다"고 호소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전세계약을 하는 날 집주인이 건축주에서 김씨로 바뀌었다고. 주현씨는 계약 당시 만났던 김씨에 대하여 "그는 휴대전화만 만지고 있어서 부동산 중개사가 대변인처럼 허락만 받고 도장을 다 찍었다"고 회고했다. 불안한 마음에 계약 이후에도 수시로 등기부등본을 확인했던 주현씨는 올해 2월에 포천세무서에 압류가 잡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됐다. 주현씨도 하루아침에 전세보증금을 날릴 위기에 놓였다.
국토교통부는 빌라왕 사태가 벌어진 이후 주택보증금 피해 임차인을 위한 설명회를 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시청이나 어느 공공기관에 문의해도 국토부와 협의해야 한다. 추진중이다라고만 말하고 정확한 답변을 주는 곳이 없다. 피해자는 어느 창구에 연락해야 확실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거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재산에 대출금액까지 전셋집에 쏟아부는 상황에서 경매집행만 남아있다며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도 있었다. 정부가 피해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하루하루가 막막한 피해자들에게는 그저 기약없는 약속일 뿐이다.
이번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대부분 20~30대의 청년세대이거나 신혼부부들이었다. 현재까지 파악된 피해 가구수만 무려 1139채에, 피해규모는 2000억 이상에 이른다. 서울을 비롯하여 수도권 일대에서는 김씨가 소유한 집이 없는 지역이 없을 정도였다.
▲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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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둘러싸고도 의문이 쏟아졌다. 공교롭게도 김씨는 하필 2년 전세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사망했다. 경찰 측이 밝힌 공식적인 사인은 허혈성 심장병이었고, 타살의 흔적이나 약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1000여 채가 넘는 집을 김씨 혼자서 관리하고 일을 벌이는 게 가능했을까. 피해자들은 김씨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김씨는 고가의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현금과 금괴를 넣어다니는 금고처럼 활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차량이 김씨의 사망 직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여기에 김씨는 생전 지인들에게 자신의 뒤를 봐주는 존재가 있었다고 공공연하게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과연 김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김씨는 어떻게 1139채에 이르는 집을 소유할수 있었을까. 지역과 액수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김씨의 피해자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전세계약집은 대부분 신축빌라였고 계약 당일이나 얼마 후 주인이 김씨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매매와 전세가가 똑같았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바로 '동시진행'이었다. 건축주는 매수자와의 매매계약, 세입자와의 전세계약을 동시에 진행하여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으로 매매대금을 치르는 수법이다. 매매가와 전세가가 같기에 매수자는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는 무자본 갭투자가 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전세계약같아도 세입자들은 새로운 집주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여기에 부동산 중개인들은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매물임을 내세워 세입자들을 안심시켰다.
피해자 송진우씨(가명)는 임대인 보증보험 가입을 조건으로 계약했으나, 김씨는 세입자가 계약종료를 통보하자 "신용불량자이고 돈이 없다"면서 집에 압류가 들어온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자신이 소유한 1139채의 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로 63억에 이르는 세금을 체납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입자들이 전세보증금 반환을 요구하며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했으나 김씨는 전화도 문자도 일절 받지 않았다. 참다못한 일부 세입자들은 김씨에게 아예 집을 구입할 것을 제안했지만, 김씨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뻔뻔하게 웃돈을 요구했다고.
▲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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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은 김씨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측근으로 알려진 공민찬(가명)이라는 인물을 만났다. 공씨는 김씨에게 일을 도와준 대가로 돈을 받았을뿐 전세 사기와는 무관하다며 선을 그었다. 김씨의 차량을 가져간 게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김씨의 외제차는 렌트한 차량이었고, 사후에 유족들이 반납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은 차량에서는 부동산 관련 서류와 쓰레기만 가득했을뿐 귀중품은 없었다고 밝혔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김씨의 부모도 아들의 사망 이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김씨를 아는 지인은 김씨가 진짜 빌라왕이 아닌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씨는 생전에 부동산 업체에서 중개 보조원으로 근무했던 경력이 있었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는 김씨의 첫 인상을 영화 <황해>에 비유하기도했다. 당시만해도 가난한 일상을 벗어나 안정된 수입이 들어온 직장생활에 만족하고 행복해했더라는 김씨는, 이후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그로부터 불과 3년 후 성실한 중개 보조원에서 일약 빌라왕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부동산업계에 일한다는 제보자 오진훈(가명)씨는 빌라왕의 배후에 '컨설팅'이라는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축빌라를 파는 사람을 컨설팅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축을 못 파니까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핵심은 바지 집주인을 구해서 계약을 맺고 대부분은 건축주가 가져가고 수수료를 뺀 나머지는 분양대행사와 컨설팅 업체가 나눠가진다. 그러니까 김씨는 명의대여자에 불과하다는 것.
제보자는 김씨가 가져간 금액이 건당 100만~200만 원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빌라 전체로 보면 15억 정도의 큰 돈이지만, 그가 세금체납으로 감당해야 할 돈(63억)에 비하면 오히려 한참 마이너스에 불과하다. 결국 김씨 역시 이용만 당한 데 불과하다는 것. 제보자는 김씨에 대하여 "뒷감당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던 것 같다. 제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김씨의 지인이나, 김씨를 만나본 피해자들도 어눌한 말투와 어설프게 외운 티가 나는 부동산 지식 등을 회상하며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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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은 김씨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를 빌라왕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모자들'을 포착했다. 김씨가 빌라왕으로 첫걸음을 내딛던 시절 그가 일했던 부동산은 조아무개라는 인물이 대표인 곳이었다. 조씨는 이 업계에서 최초로 동시 진행 수법을 시작했던 사람으로 수많은 신축 빌라를 거래하고, 김씨나 1세대 빌라왕으로 꼽히는 강아무개씨같은 명의대여자들을 내세워 많은 작업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년 전 조씨 일당의 전세사기 사건을 맡아 피해자들을 변호하고 있는 신중권 변호사는 "2020년에 검찰에 송치되었던 사건이 3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다"고 꼬집었다. 또한 빌라왕 김씨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바지 사장으로 "어눌하기도 하니까 이용하기 편한 입장이었을 것"이라며 조씨 일당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이용 당했을 확률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김씨를 비롯하여 이른바 역대 빌라왕으로 꼽혔던 '악성 임대인'들의 계보가 알려지며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왕이 죽거나 이름이 바뀌어도, 정작 주변을 맴도는 '킹메이커'들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규모 전세사기가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크게 없는 상황이다.
점점 지능적이고 교묘해지는 전세사기의 가장 큰 위험은, 우리 국민들 누구에게나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 개개인이 아무리 똑똑하고 사전에 검토를 한다고 해도 함정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데 있다. 피해자들 중에는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거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서까지 검토하는 등 사실상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피해를 막지 못 한 사례가 다수였다.
또한 현장의 부동산 중개인들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위험부담이 있는 매물을 고객들에게 권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중개인들의 말만 믿고 그대로 따랐다가 낭패를 본 피해자들은 "정작 문제가 터지면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회피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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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관계자들은 빌라왕 사태는 앞으로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폭탄은 이제 시작이다. 집값이 한창 폭등했던 2019~2020년에는 전세 가격이 더 높게 책정됐기 때문"이라고 경고했다. 제보자 오씨는 "컨설팅들은 2년 뒤에 무조건 문제가 터질 것을 안다. 안심으로 넣은 세입자는 피해가 없지만, 그 돈을 메꾸는 것은 보증보험, 즉 나랏돈이다. 이 '눈먼 나랏돈'을 누가 먹느냐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전세사기 확산에는 관계기관의 책임도 크다. 조정흔 감정평가사는 "전세자금 대출을 정부에서 보증해주다보니 은행은 쉽게 이자장사를 할 수 있다. 전세보증보험도 주택담보가치에 대한 검증 절차없이 국가기관에서 100% 보증을 해준다. 그러다보니 전세가격이 올라가고 사기 피해도 확대된다"고 지적했다. 전세 피해자들은 "이렇게 매뉴얼이 없을지 몰랐다. 임대인이 사망하고 나서의 대책이 전혀 없더라"며 허탈해했다. 주택보증이행공사는 빌라왕 사태 이후 보증이행절차 개선 등 각종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해명했다.
투기세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의 마련도 중요한 현안이다. 오씨는 "컨설팅들이 참고인 조사를 받아도 별다른 처벌이 없으니 안심하고 있다. 이 사람들을 처벌할 법이 없으니 면죄부를 주는 격이다"라고 경고했다.
피해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 하여 속수무책인데 오히려 가해자들(전세사기 공모자들)만이 법의 사각지대에서 반성도 처벌도 없이 또다른 사기를 기획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형국이다. 피해자들은 억울한 피해를 당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자책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택거래시장에서 전세의 비중이 큰 대한민국에서 전세 사기의 역사도 뿌리가 깊고 피해는 해마다 커지고 있다. 정부는 대책마련과 피해자 보호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갈길이 멀다.
제작진은 빌라왕 사건이 이슈가 되면서 취재하던 중에, 컨설팅 세력들이 전세사기판에서 꼭 필요한 바지명의자들의 대상을 곧바로 바꾸면서 수사당국보다 한 발 더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제작진이 만난 한 제보자는 "이번에도 어설프게 수사하고 끝낸다면, 이건 (전세사기를) 그냥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경고한 내용은 우리 모두가 아프게 새겨야 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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