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배달 리어카에 실려온 새카만 산모..." 기적의 의료인 자매
아버지 이어 부산에서 2대에 걸쳐 인술 펼친 호주인 매혜란 매혜영 자매
“내가 아들이 없지만 딸을 한국으로 보내어 봉사하게 하겠다.”(1940년대 초 매혜란·혜영 아버지 의사 매견시)
1952년 매혜란(헬렌 맥켄지·1913~2009)·매혜영(캐서린 맥켄지·1915~2005)이 부산 좌천동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제임스 맥켄지(한국명 매견시·1865~1956)의 바람대로 봉사를 위해 ‘아버지의 나라’ 호주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귀향한 것이다.
그런데 자매의 나라 한국은 6·25전쟁이라는 비극을 겪고 있었다. 부산은 피난민으로 넘쳐났다. 버려진 아이들과 걸인, 상이군인과 나병(정식 명칭 한센병) 환자들이 “한 푼 줍쇼”를 외치고 다녔다.
‘호주 매씨’를 자처했던 한센병 전문 의사 겸 목사 매견시는 1910년 2월 부산에 도착했고 1912년 부산 감만동에 설립된 부산나병원(‘상애원’) 원장에 취임했다. 한국 최초의 나병원이었다.
1939년 일제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시키면서 부산나병원도 폐쇄됐다. 매견시도 본국으로 쫓겨났다. 당시 상애원에는 600여 명의 나환자가 있었다.
자매의 어머니 메리 켈리(1880~1964)도 남편의 뜻을 따라 나환자를 돌보는 한편 나환자 자녀를 격리, 기숙사에 입소시키고 학교 교육을 담당했다. 고아원도 운영했다.
지난달 20일. 부산 좌천동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언덕길에서 내려다 본 부산 시내. 멀리 부산항 제7부두와 감만동·용호동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감만동과 용호동에는 ‘부산나병원’을 비롯한 나환자자립공동체가 있었다.
그 문화관 바로 아래는 일신기독병원, 부산진교회, 일신유치원, 근대유적 일신여학교 등이 자리한다. 부산에 도착한 매견시는 이곳 부산진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면서 부산나병원 원장을 겸했다. 부산나병원은 1909년 미국 북장로회 파송 의사 어빈이 ‘영국구라협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 매견시가 2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상애원’ ‘상애요양소’라는 이름으로 확대했다.
그 무렵 매견시 부부의 집은 좌천동이었다. 좌천동은 조선의 옛도시 ‘부산진’이었으며 지금의 일신기독병원 구관 앞 도로는 번성했던 좌천시장이었다.
혜란과 혜영은 부산진교회 일대 호주장로교회 부산스테이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자매는 1930년대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자녀를 위해 설립된 평양외국인학교로 진학,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자매는 호주로 들어가 공부했다. 혜란은 멜버른의대, 혜영은 로열멜버른간호학교를 졸업했다.
사실 자매는 일제가 아버지를 추방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부산나병원과 공동체, 학교 등을 운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애원’은 폐쇄됐고 그 자리는 일본 병참기지가 됐다.
1952년 9월 17일 부산진교회 부설 일신유치원 작은 방에서 ‘일신부인병원’의 진료가 시작됐다. 자매는 ‘본 병원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본에 따라 그 정신으로 운영하며 불우한 여성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육체적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정신을 구현한다’라고 공포했다.
1905년 교사로 부산에 들어왔던 자매의 어머니 메리가 부산의 비참함을 두고 “기이한 도시”라고 했는데 1952년 자매가 병원을 열었을 때는 “폐허의 도시”라고 했다.
병원 입원 환자 40%, 외래 환자 12%가 무료 환자였다. 혜란은 무료 환자 누구라도 진료 기록을 남겼는데 그 주소가 ‘역전’이라고 쓴 경우가 많았다. ‘다리 밑’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주소도 없는 가난한 여성 환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자매가 각기 1976년과 1978년 은퇴 전까지 수십만의 아이가 이 병원에서 태어났다. 2010년 1월 8일자로 28만5000번째 아이가 태어났다고 기록됐다.
‘인술 2대 맥켄지가’는 1910~1970년대 부산·경남의 참의사로 활약했다. 자매가 일신기독병원을 은퇴하고 돌아갈 때 각기 작은 트렁크 하나였다. 자매는 호주의 평범한 요양원에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한국의 숱한 제자들과 뜻 있는 시민이 역사관을 열고 기념비를 세워 맥켄지가를 추모하고 있다.
홀로 출산하다 병원에 실려온 산모, 매씨 자매 '23년 지기' 되다
일신기독병원(초기 일신부인병원)은 1950~1980년대 병들고 가난한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1970년대 한 진료 기록. ‘한 산모가 얼굴을 비롯한 전신이 새카만 채 분만실로 이송됐다. 산통에 시달리다 죽기 직전 운반되었는데 그 이송 도구가 연탄 배달 리어카였다. …가난한 산모는 분만실에 올 돈이 없었던 것이다.’ 원장 매혜란은 예의 그렇듯 단 한 푼의 치료비도 받지 않고 출산 선물까지 쥐어 주며 산모를 축복해 주었다.
“그 분들을 만난 것은 내게 기적이었다.”
1962~1985년 일신기독병원 기숙사 안내를 맡았던 최 아주머니. 그녀는 스물일곱 나이에 혼자 아이를 낳다가 심장병으로 응급실에 호송되어 산소 호흡기를 꼽은 채 두 달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5층 병동으로 옮겨져 5개월을 더 치료 받았다.
“퇴원할 때 전부 무료였어요. 심지어 매 원장님이 집까지 데려다주는 거예요. 원장님이 ‘한 달에 한 번씩은 온나’라고 하셨어요. 그 후 굶지 말라고 월 3000원씩 주셨어요. 제가 글을 몰랐어요. 먹고 살 수가 없었죠. 할 수 없이 원장님을 찾아가니 ‘기숙사 다 지어가니 거기로 온나. 힘든 일 못하니 안내 일을 하면 되겠네’ 하셨어요.” 최 아주머니는 23년 만에 퇴직했다.
부산=글·사진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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