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실태추적]②“한겨울 돈 없어 보일러도 못 틀어”…‘빌라왕’에 지옥이 된 청춘

곽민재 2023. 1. 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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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왕 김모씨로부터 1억1400만원 전세사기
보증보험 갱신 못해 빚 떠안고 채무불이행자 전락
"희망 갖고 살 수 있도록 신용만이라도 회복되길"

[아시아경제 곽민재 기자] "전세 계약할 당시 집주인은 젊은 부부였어요. 애들이 크면서 아버지랑 합치려고 전세를 내놓았다고 했죠. 등기부등본도 깨끗했고 전세보증보험에도 가입해서 제가 전세사기를 당할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틀 전 카카오뱅크 신용점수를 보니 844점에서 200점이 돼 있더라고요. 휴대폰만 멍하니 보며 밥도 안 먹고 온종일 울었던 것 같아요."

전세사기로 전세보증금을 돌려 받지 못해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이모씨의 신용점수는 844점에서 200점까지 떨어졌다. [사진제공=이모씨]

학업 포기하고 피땀 흘려 마련한 목돈…못 돌려받으며 채무불이행자 전락

올해 24살이 된 이모씨는 초조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씨는 전세사기를 당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됐다. 일을 안 한 것도 돈을 펑펑 쓰며 사치를 부린 것도 아니다. 주택 1139채를 매입해 임대한 후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다가 지난해 10월 사망한 빌라왕 김씨로부터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것. 전세대출 연장이 안 되면서 결국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그가 돌려받지 못한 전세보증금은 총 1억1400만원이다. 3년 전 그는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5층 건물 빌라에 전세보증금을 주고 계약했다. 1억원은 ‘중소기업취업청년 전월세보증금대출’을 받았고 나머지 1400만원은 그가 2년 동안 꼬박 일하며 적금을 통해 모은 돈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일찍이 포기하고 한 중소기업에 경리로 취업했다. "아버지는 볼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세요.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사시는데 저까지 손을 벌리기 어려워 빨리 취업을 결심했죠. 적금이 만기 돼 목돈이 생긴 그날 부푼 마음을 품고 공인중개업소를 찾았습니다."

전세계약을 마치고 1주일이 채 안 됐을 무렵 그는 임대인이 법인으로 변경됐다는 알람을 받았다. "은행에 전화해서 임대인이 변경됐다고 하는데 제가 별도로 조치할 게 있는지 물어봤지만, 전세계약은 저절로 인계된다는 말에 안심했어요. 더욱이 계약 후 몇 달 있다 변기가 고장 나서 수리를 요청했더니 법인의 실장이라는 사람이 신속히 수리도 해줬습니다." 법인이라도 체계적으로 잘 관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는 안심했다.

지옥은 서서히 다가왔다. 만기일이 다가와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종부세가 많이 나와 신용불량자가 됐습니다. 그 집도 압류될 겁니다. 빌라 매매밖에는 돈을 돌려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법대로 하셔도 됩니다’라는 단체 문자뿐이었다. "사실 이 문자를 받고도 곧바로 전세사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오빠와 함께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갔는데 상담해주시는 직원이 임대인의 이름을 잘 알고 있더라고요. 그때 이 사람에 대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정말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빌라왕'으로 알려진 임대인 김모씨가 지난해 7월5일 인천 미추홀구 소재 빌라에 사는 임차인 이모씨에 보낸 문자 메시지의 내용. [사진제공=이모씨]

"임대인 법인이라 갱신 안 돼"…믿었던 보증보험의 배신

하지만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취급하는 ‘중소기업취업청년 전월세대출’ 100%를 받았고 이중으로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까지 가입했으니 보증금을 날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씨는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고 곧바로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반환보증 이행청구를 했다. 하지만 공사 쪽은 계약기간이 지나버려 ‘묵시적 계약연장’이 된 경우라며 전세금 반환 사유가 안 된다고 했다. 다만 임대인으로부터 신분증과 함께 계약해지에 대한 동의를 받은 문자 등을 제시할 경우 이행청구 심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급한 마음에 이틀 동안 꼬박 임대인에게 계약해지 동의를 요청하는 문자 20통을 보내고 전화를 40통 넘게 걸었어요. 하지만 집주인은 답이 없었고 결국 저를 차단했습니다." 몇 달 후 임대인 김씨는 갑자기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뇌출혈로 알려졌다.

이씨는 반환보증 이행청구를 위해 빌라왕이라 불리는 임대인 김모씨에게 계약해지에 대한 동의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결국 임대인으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다. [사진제공=이모씨]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보증보험 갱신’ 뿐이었다. 갱신을 하면 전세대출이 연장이 되고 내용증명 도달일로 계약해지를 보고 3개월 후에 이행청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씨는 결국 임대인이 법인이라는 이유로 보증보험을 갱신하지 못했다. 은행으로부터 당장 1억원을 상환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부모와 형제, 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고 다른 대출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이씨는 3개월째 이자가 연체된 상태다. 1.2%였던 대출 이자는 연체가 돼 현재 4%까지 치솟았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이씨의 집에는 은행으로부터 발송된 ‘법적절차 착수 예정통지서’와 ‘기한이익 상실내용 통지서’가 날아왔다. [사진제공=이모씨]

"기존에 사용하던 신용카드는 거래 정지 통보가 곧바로 날아왔어요. 일을 마치고 집에 있으면 은행에서 등기로 ‘법적절차 착수 예정통지서’, ‘기한이익 상실내용 통지서’ 등이 날아올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듯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돈은 임대인이 썼는데 이걸 왜 내가 감당해야 하나.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회사에 출근해도 좀처럼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하루에도 일이 4~5번 밀리는 것은 물론, 적은 인력이 근무하는 중소기업 특성상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 주택도시보증공사를 찾아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그는 "원래 제가 편두통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는 이따금 앞이 안 보일 만큼 심해졌어요. 빚을 갚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해서 약을 먹으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보증금 반환 바라지도 않아…신용만이라도 회복되길"

돈이 없어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못하고 패딩과 내복, 수면 양말을 착용한 채로 산다는 이씨가 당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전세보증금 1억1400만원을 돌려받을 수 있으면 가장 좋겠죠. 근데 과연 가능할까요. 지금 제가 당장 원하는 것은 신용점수 회복이에요. 24살의 나이에 월급 180만원으로 모든 생계를 책임지라는 것은 사형선고에 가깝습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갖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신용점수가 회복되는 것. 전세사기 피해자인 20대 청년 이씨의 바람이다.

곽민재 기자 mjkwa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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