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보통 사람들의 슬램덩크
A팀: 송태섭 남훈 전호장 신현철 채치수, B팀: 이정환 윤대협 서태웅 강백호 신현필
이 이름들을 보고 무심코 어느 팀이 더 강할지 따져봤다면 아마 만화 ‘슬램덩크’의 오랜 팬일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슬램덩크 밸런스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가상의 3~5개 팀을 비교하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어떤 팀이 제일 강한지를 놓고 “농구라는 스포츠를 아예 모르는 것 같다” “만화를 보긴 했냐” 같은 격한 논쟁도 벌어진다. 대부분 3040 아저씨가 된 원작 팬들이 만화 속 선수들을 떠올리며 열심히 글을 적는 모습에 슬며시 웃음도 난다.
A팀 송태섭은 168㎝로 키가 작은 포인트 가드다. 빠른 속도와 돌파가 주무기지만 득점력이나 수비력이 좋지는 않다. 송태섭이 다니는 북산고 농구부 주전 동료들은 하나같이 주인공이 될 만한 매력을 갖고 있다. 팀의 대들보인 주장 채치수, 초보지만 괴물 같은 운동 능력의 강백호, 꽃미남이자 팀의 에이스인 서태웅, 불꽃 같은 3점 슛이 특기인 정대만. 이들에 비하면 송태섭은 어중간한 선수다. 만화에서는 같은 포지션의 상대편 선수에 밀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동료들에 비해 분량도 많지 않다. 앞서 언급한 밸런스 게임에서도 많은 독자가 그를 팀의 약점이나 구멍으로 꼽곤 한다.
어디까지나 ‘보통 선수’였던 송태섭은 만화 완결 26년이 지나 개봉한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주인공으로 조명받는다. 이번 극장판은 학창 시절 슬램덩크를 봤던 3040 세대의 입소문을 타고 개봉 10일 만에 80만 관객(14일 기준)을 돌파했다.
극장판은 만화 속 북산고와 산왕공고의 경기를 다룬다. 결과는 원작과 같지만 만화에 나오지 않았던 송태섭의 어린 시절과 아픈 가족사가 그려진다. 그저 그런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벽에 부딪쳤던 장면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좌절 속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일을 살아가는 시간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강함’의 의미와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이 중요하다. 아픔과 상실, 잘 되지 않는 것, 살아가면서 누구나 통과하는 길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만화에는 ‘잘 되지 않는 것’을 아는 또 한 명의 보통 사람이 있다. 북산고에서 주로 교체 선수로 투입되는 권준호다. 그는 중학교 때 체력을 키우기 위해 농구부에 들어왔다. 신체 조건,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별다른 기술도 없지만 남들은 힘들다고 관두는 농구부를 6년이나 계속했다. 상대편 감독도 별 볼 일 없는 선수로 치부하지만 결국 권준호는 전국대회 본선 진출에 가장 결정적인 3점 슛을 성공시킨다. 날아가는 공이 림을 가르기까지 그가 묵묵히 걸어온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슬램덩크가 주인공들의 화려한 성공과 전국대회 우승으로 결실을 보았다면 아마 지금처럼 많은 3040들이 오랜 시간 열광하고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을 것 같다. 10대 시절 슬램덩크를 읽을 때의 우리는 ‘슈퍼루키’ 서태웅, ‘농구천재’ 강백호, ‘불꽃남자’ 정대만처럼 모두가 주목하는 코트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 취업, 입사, 직장 생활이라는 코트는 주연을 쉽게 허락한 적이 없었다. 공직자들과 전문직이 얽힌 부동산 개발 비리 의혹, 프로 선수들이 연루된 병역 비리 의혹 소식은 가끔 ‘그들만을 위한 코트’가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박탈감마저 느끼게 한다. 노력 끝에 기적처럼 성과가 찾아와도 바로 다음 단계에서 허무하게 꺾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꿈꿔온 ‘전국 제패’는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린 현실에서도 체감하며 배워왔다.
그럼에도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내일이 두려워도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는 어쩌면 현실의 림을 향해 벽을 ‘뚫어’야 하는 송태섭 권준호와 더 닮았는지 모른다. 새해에는 보통 사람들이 터트리는 ‘슬램덩크’가 사회에 더 많은 울림을 주길 소망해본다.
나성원 사회부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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