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업에 '임금 인상' 강조했지만... 일본 민심 싸늘한 이유

윤현 2023. 1. 1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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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가·임금 정체에 실질임금 하락세... 서민들 '생활고' 가중 우려

[윤현 기자]

 지난달 12월 20일 도쿄의 한 거리에서 한 남성이 도쿄증권거래소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 AFP=연합뉴스
 
40년 만의 물가 상승으로 위기에 몰린 일본 정부가 '임금 인상'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일본 국내 반응은 회의적이다. 

일본의 지난해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3.7%로 1982년 4월(4.2%) 이후 40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오랜 기간 저물가가 이어졌던 일본에 물가 상승이 찾아온 것은 '아베노믹스'의 영향이 크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재임 시절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겠다면서 경제 활성화와 물가 상승을 유도하기 위해 대규모 양적완화, 재정지출 확대, 구조개혁 등 이른바 '세 가지 화살'을 내세운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를 띄웠다. 

그 결과 물가는 상승했으나,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 폭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내수침체 문제가 불거졌다. 양적완화로 엔화 가치는 떨어진 데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까지 불안해지면서 물가가 급격히 치솟았다.

이와중에 기업들이 비용 경감을 위해 임금 상승을 억제해왔고, 실적이 좋아도 '타 기업을 배려한다'는 취지인 수평의식 등이 영향을 줘 서민의 월급봉투는 사실상 그대로인 상황에 봉착했다. 일본 국민들은 당장 먹는 것과 입는 것부터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중에 '타 산업을 배려한다'는 취지인 수평의식 등의 영향으로 서민의 월급봉투는 사실상 그대로인 상황에 봉착했다. 일본 국민들은 당장 먹는 것과 입는 것부터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기시다 총리, 임금 인상에 안간힘... 이유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023년 1월 10일 이탈리아 조리지아 멜로니 총리와 회담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일본 후생노동성이 지난 6일 발표한 월별 근로통계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종업원 5명 이상 사업장의 1인당 실질임금은 전년 동월 대비 3.8%나 감소하며 8개월 연속 떨어졌다. 국민은 지갑을 닫고, 고급 인력은 더 높은 임금을 주는 해외 기업을 선택하면서 일본 경제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그러자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월 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임금이 매년 늘어나는 구조를 만들겠다"라며 "재계가 물가 상승분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을 실현해 달라"고 당부했다. 

'정부가 민간 영역인 노사의 임금 협상에 개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에도 기시다 총리가 총대를 메고 나선 건 정권의 명운이 걸렸기 때문이다.
 
 일본 실질임금 하락 현상(후생노동성 발표 자료)을 보도하는 NHK 방송 갈무리
ⓒ NHK
 
<로이터통신>은 6일 칼럼에서 "기시다 총리는 오는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존재감을 보여준 뒤 총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장기 집권을 기대하고 있지만, 물가 상승이 '급소'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권 출범 후 최저치를 갈아치우고 있는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 부진은 서민들의 생활고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본 최대 노조 일본노동조합총연합(렌고·連合)도 "코로나19·고물가·엔저라는 삼중고가 가계를 압박하며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라며 "일본의 임금 수준은 세계 수준에 못 미치는 데다가 물가 상승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가 위축되고, 인력도 부족하다"라고 임금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언론도 거들었다.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4일 치 사설에서 "일본의 평균 임금은 주요 선진국 중 최저 수준"이라며 "일본 기업들은 실적이 좋더라도 경영난을 겪는 타 기업을 배려해 임금 상승을 꺼리는 수평 의식이 강한 탓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실적이 좋은 기업이 먼저 임금을 인상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사설을 통해 "일본 기업들이 비용 경감을 위해 임금 인상을 억제해왔으나, 그 결과는 내수 침체"라며 이제는 경영자들이 발상을 바꿔 임금 인상에서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목표로 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나아가 "중소기업도 더 이상 값싼 노동력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라며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데 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는 기업은 퇴출 압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강경한 논조를 보였다.

정권·재계·언론 한목소리인데... 민심은 '글쎄'

재계는 곧바로 화답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재계 단체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経団連)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은 "올해 일본 경제의 키워드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라며 "(성과급이 아닌) 기본급 중심으로 임금을 인상해서 물가 상승률을 밑돌지 않도록 회원 기업들에 당부하겠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일본 최대 의류업체 패스트리테일링은 3월부터 일본 근무 직원들의 임금을 최대 40%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산토리홀딩스는 6% 이상, 닛폰생명보험은 7% 이상 등 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수준으로 임금을 올리겠다며 목표치를 내놨다.

오랜만에 노·사·정 그리고 언론까지 한목소리를 내며 임금 인상을 촉구했으나 성과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회의적인 반응까지 나온다. 임금 인상이 일회성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과 대기업 위주의 임금 인상 분위기가 중소기업까지 확산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2023년 일본 임금 전망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하는 NHK 방송 갈무리
ⓒ NHK
  
이와 관련해 렌고의 요시노 토모코 위원장은 일본 NHK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중소기업의 임금 인상이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기 때문에 이를 위한 환경 정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라며 "프리랜서 등 노조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파급 효과가 닿도록 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NHK 방송이 11일 발표한 여론조사(7~10일 실시) 결과에 따르면, 임금이 '크게 오를 것'이라고 기대한 응답은 단 2%에 그쳤다. '어느 정도 오를 것'이라는 답변도 25%였다. 반면 '별로 오르지 않을 것' 53%, '전혀 오르지 않을 것' 13% 등 부정적인 응답이 69%에 달했다. 

또한 올해 경제가 '좋아진다'는 응답은 11%에 불과한 반면에 '나빠진다'는 응답은 26%, '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5%로 기록해 우려가 크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사히> "일본 경제 열쇠인 '개인소비' 정체 불안감 커져"
 
 일본 도쿄의 슈퍼마켓 앞에서 한 시민이 매장 바깥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고 있다.
ⓒ AF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임금을 인상해서라도 개인 소비가 늘어나면, 제품 가격을 올려 기업의 비용 증가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경제 이론을 내세운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아사히신문>은 지난해 12월 일본 주요 100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물가 상승으로 원재료 가격이 너무 오른 탓에 임금까지 올리면 제품 가격 상승으로 모두 흡수하기 어렵다고 답한 기업이 절반이 넘었다"라며 "소비자는 가격 인상에 민감하기 때문에 섣불리 제품 가격을 올리면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히 일본은 지난 30년간 저물가를 유지해왔기에 소비자의 저항이 매우 클 것"이라며 "경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개인 소비가 정체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아베 정권도 매년 3% 이상의 임금 인상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기업들에 충분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해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기시다 총리도 이를 되풀이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도쿄의 한 시장 상인은 NHK와의 인터뷰에서 "제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일본 사회의) 고령화로 인해 연금만으로 어렵게 생활하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최대한 가격 인상을 자제하려고 한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일본이 국가적으로 나선 임금 인상이 과연 내각의 바람대로 '경제의 선순환'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전문가 등의 우려대로 서민의 생활고와 양극화라는 부작용만 남길지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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